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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기의 괴로움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을 버리는 일이 어디 쉬운가? 나처럼 '물자절약'이라는 구호를 듣고 자란 세대가 아니라 해도 말이다(내가 무심코 이 단어를 입에 올렸더니, 지인들이 웃으며 요즘은 물자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는다고 가르쳐주었다. 하긴 물자라는 말을 들으면 군수물자가 먼저 생각난다). 제대로 읽지 않은 신문과 잡지, 각종 단체의 소식지(어떤 것은 배달된 상태 그대로여서 버리기 직전에 봉투를 뜯는다)를 주말마다 재활용품 수거함에 대량 투척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일까?

ⓒgermi_p via Getty Images

대청소를 하다 보면 집안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오는 잡동사니의 양에 놀라게 된다. 포도주병 따개만 해도 여섯 개나 된다. 하나는 내가 산 것이고 나머지는 선물 받은 포도주에 딸려온 것이다. 볼펜도 삼십 자루쯤 있다. 그중 절반에는 호텔이나 학원, 학회, 시민단체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또 노트북 살 때 덤으로 얻은 컴퓨터 가방이 여섯 개, 기념품으로 받은 탁상시계 네 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차와 향초, 입욕제와 방향제가 있다. 이런 물건들의 특징은 대청소할 때마다 굴러 나왔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다시 나타날 때면 그 수가 한층 늘어 있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 라이프'에 관한 책에는 이런 물건들을 처리하는 원칙이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컴퓨터 가방이나 포도주병 따개를 보며 마음이 설렐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이 물건들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한다.

하지만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을 버리는 일이 어디 쉬운가? 나처럼 '물자절약'이라는 구호를 듣고 자란 세대가 아니라 해도 말이다(내가 무심코 이 단어를 입에 올렸더니, 지인들이 웃으며 요즘은 물자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는다고 가르쳐주었다. 하긴 물자라는 말을 들으면 군수물자가 먼저 생각난다). 제대로 읽지 않은 신문과 잡지, 각종 단체의 소식지(어떤 것은 배달된 상태 그대로여서 버리기 직전에 봉투를 뜯는다)를 주말마다 재활용품 수거함에 대량 투척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일까?

'버리는 기술'에 대한 책이 인기를 끄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책들은 '단샤리'(끊고 버리고 벗어난다는 뜻으로,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운동이라고 한다) 같은 그럴듯한 말로 버리는 행위에 수반되는 죄책감을 완화한다. 이 책들은 더 적게 소비하고 적게 버리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물건이 더 적어 보이게 공간을 연출하는 방법, 다시 말해 수납문제의 해결법을 제시할 따름이다. 〈버리는 즐거움〉의 저자 야마시타 히데코는 이를 위해 일회용품의 과감한 사용을 권하고 있다. 행주 대신 종이타월을 쓰고,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반 이상 차면 버릴 것. 식탁 매트도 일회용이 좋다, 등등.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릴 자유는 구매의 자유보다 더 근원적이다. 구매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돈이 없는 사람)도 이 자유만큼은 똑같이 누리고 있다.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물건을 사들이지 못할 것이다. 아마 개나 고양이를 입양할 때처럼 신중해질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정부와 지자체는 버릴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리기는 의무이기도 하다.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의 신생아들은 잠든 상태에서 "6만 2천 4백번" 다음과 같은 속삭임을 듣는다. '수선보다는 버리는 것이 좋다. 바늘땀을 많이 뜰수록 부는 감소한다.' 버리기는 또 노동이다. 가사노동의 많은 부분은 물건들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 버릴 물건을 골라내고 버릴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일로 이루어진다.

요즘 나는 (윗집 부엌에서 물이 새서 우리 집 천장이 젖은 뒤로) 한 달째 버리는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매일매일 물건에 파묻혀서 지내다 보니 집이 독립된 생명체이고 나 자신은 이 생명체의 대사활동을 돕는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마저 든다. 점점 더 많은 물건을 삼키고 쓰레기를 뱉어내는 이 생물체의 탐욕을 어떻게 하면 제어할 수 있을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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