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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에서 연구진실성위원회로

시대에 따라 상황과 맥락이 바뀌고 그로 말미암아 판단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존 벽돌과 새 벽돌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원칙엔 변함이 없습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김상곤 교육부 장관의 1992년도 박사논문에 연구 부적절행위가 있었다고 판정했습니다. 학위를 취소할 정도의 연구 부정행위는 아니라 했습니다. 부적절행위도 잘못은 잘못입니다. 김상곤 장관의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로 그의 교육부 장관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뉴스1

학자는 자신이 연구한 결과를 논문에 담아냅니다. 연구 수행과 논문 작성을 벽돌쌓기에 견주면, 다른 연구자들이 쌓아놓은 수많은 벽돌 위에 자기 자신의 벽돌을 한두장 얹는 셈이지요. 기존 벽돌과 새 벽돌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게 바로 인용입니다. 그런데 인사청문회 때면 늘 국회에서 후보자의 논문과 관련해 거친 논란이 일더군요. 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① 이미 누군가 해놓은 일을 자기가 처음 한 일인 양 이야기하는 건 명백한 잘못입니다. ② 이미 누군가 써놓은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도 잘못이지요. ①을 '내용 표절', ②를 '문장 표절'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문장이 상당 부분 비슷하면 내용도 닮아갈 테니 내용과 문장을 엄격히 분리하긴 어려울 성싶습니다. 그러니 내용 표절과 구별해 문장 표절을 말할 땐, 내용에 독창성이 있음은 전제해야겠지요.

①과 ②가 다 잘못이지만, 그 정도는 다릅니다. ①은 예나 지금이나 연구 부정행위입니다. ②를 연구 부정행위라 해야 할지, 아니면 연구 부적절행위라 해야 할지는 표절된 문장의 규모나 중요성을 보고 따져야 할 사안이고요. 참고로 연구 부정행위보단 덜 심각한 잘못을 일컬어 연구 부적절행위라 합니다. ①은 ②보다 더 큰 허물입니다.

③ 자신이 이미 해놓은 일을 인용하지 않고 다시 발표하기도 합니다. '중복게재'입니다. 일반적으론 연구 부정행위지요. ④ 자신이 이미 써놓은 문장을 출처 표기 없이 그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문장 재활용'입니다. 연구 부적절행위라 여깁니다. 자기 문장인데 왜 다시 활용하지 말라는 걸까요? 새 논문에선 문장도 새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학자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학술논문의 저작권이 대부분 학술지에 양도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내용 표절(①)은 예나 지금이나 연구 부정행위입니다. 문장 표절(②)은 과거엔 부적절행위 정도로 판단했지만, 지금은 좀 더 심각한 사안으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독창적 주장이 담겨 있다면, 내용 표절만큼 큰 잘못은 아니라 해야겠지요. 중복게재(③)는 연구 부정행위입니다만, 상황에 따라선 허용되기도 합니다. 문장 재활용(④)은 이제 부적절행위로 받아들여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과거엔 별문제가 아니었지요.

시대에 따라 상황과 맥락이 바뀌고 그로 말미암아 판단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존 벽돌과 새 벽돌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원칙엔 변함이 없습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김상곤 교육부 장관의 1992년도 박사논문에 연구 부적절행위가 있었다고 판정했습니다. 학위를 취소할 정도의 연구 부정행위는 아니라 했습니다. 부적절행위도 잘못은 잘못입니다. 김상곤 장관의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로 그의 교육부 장관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25년 전의 부적절행위를 두고 지금의 부정행위에 걸맞은 책임을 묻는 건 좀 가혹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내용 표절의 여부는 그 분야의 전문성이 있어야 판별할 수 있습니다. 내용을 모르고 시시비비를 가릴 순 없겠지요. 법률적 판단을 법원에 맡기듯, 연구윤리 관련 논점은 기관 연구진실성위원회에 맡기면 어떨까요. 연구진실성위원회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재심을 청구하면 됩니다. 물론 신뢰의 문제가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학계도 성찰해야 하겠지요. 바람직한 연구윤리 문화의 정착을 방해하는 구조적 요인도 더불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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