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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 인터뷰] 5년 만에 돌아온 김애란은 '번번이 과정'이라 말한다

  • 박세회
  • 입력 2017.07.04 14:00
  • 수정 2017.07.04 17:39

문학청년들의 아이돌 김애란이 단편 소설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을 들고 찾아왔다. 2012년 겨울부터 올봄까지 쓴 단편 7개를 묶었다. 가장 오래된 소설은 '침묵의 미래', 가장 어린 소설은 올봄에 쓴 '가리는 손'이다.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내는 다섯 번째 소설집.

오랜 팬이라면 첫 소설부터 놀랄지 모르겠다. 5년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그녀의 소설은 많이 변했다. 그런데 다행히 그녀의 소설만 변한 게 아니라 우리도 그만큼 변했다. 같은 세상을 살아서다.

‘반드시라기 보다는 꽤 자주 실패'하면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 시도하고 모색하며' 성실하게 품을 들이는 소설가 김애란을 만났다.

소설집이 나오고 한 인터뷰를 보니 '많이 무거워졌다', '유머가 없어졌다'는 평이 있더군요. 의식하면서 쓴 건가요?

= 아뇨. 의식하진 않았어요. 단편집은 묶고 나면 생기는 성격이 있어요. (묶고 나서) 소급해서 생각하게 되지 처음부터 의식하거나 정해놓고 쓰진 않아요.

마지막으로 묶기 직전에 전문을 다시 타이핑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들었어요. 그러면서 통일성이 생기진 않나요?

= 그렇지는 않아요. 거칠고 불안정하게 발표했을지언정 처음의 리듬이 바뀌거나 사라지는 경우는 없어요. 각 단편에서 처음에 잡은 리듬은 다음에 매끄럽게 고치려고 해도 관성으로 가는 게 있어서 바뀌지 않아요. (리라이팅 과정에서) 호흡을 다듬기는 해요. 몸으로 쓰면서 만드는 (또 다른) 리듬이 있는데, 손가락으로 타이핑하면서 호흡이 생겨서 안정적으로 느껴지게 고친 과정인 거죠. 저만 하는 작업은 아니고 대부분의 작가가 하는 거예요.

다양한 시기에 쓴 단편들인데 모든 단편에 누군가의 죽음이 들어가 있더군요. 우연인가요? 아니면 그런 단편만을 모은 건가요?

= 우연이에요.

쓰면서 힘들지는 않았나요?

= 소설 하나 마칠 때는 기본으로 드는 품이 있긴 한데, 대부분 어렵게 쓰기는 했어요. 그래서 오래 걸리기도 했고, 계간지에 처음 발표했을 때는 (소설의) 상태들이 좀 많이 거칠었어요. 몸이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태에서 써야 하는데, 저도 그게 조절이 잘 안 되는 상태에서 들어가서 거칠게 나온 얘기들이 있었어요. ‘입동’이 그런 경우에요. 다듬으면서 손을 좀 봤어요.

기자가 실제의 사건이나 인물을 취재하듯이 결국 소설가도 자신이 만든 인물이나 사건을 내면적으로 취재하는 건데, 감정적으로 힘들었을 것 같아요.

= (제가) 활자화해서 이야기로 만들다 보니 남들보다 바깥에서 작품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가 많아서 그렇지, 이야기를 쓴 분이든 쓰지 않은 분이든, 시민도 독자도 비슷한 시간을 지나왔을 거로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쓸 때 어려웠거나 힘들었던 게 강조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렇네요. 그리고 뭐 직업인데요.

소설에는 죽음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어떤 소설에는 죽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음’과 비슷하면서 다른 단어가 아마 '상실'이나 '결핍'일 거예요. 많은 문학이 혹은 작가들이 그걸 다루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다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거나 뭔가 잃는 경험을 하잖아요? 다 가진 사람처럼 보여도, 결국은 그 사람도 젊음을 잃고 있죠. (소설의 관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잃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소설이라는 장르가 다뤄 온 주제 같아요.

예전의 제 인물들은 그 결핍을 농담이나 상상이나 환상으로 대면하거나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다만 이번 소설 같은 경우엔 마지막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 ‘명지’(물에 빠진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교사의 아내인 화자로 등장)는 ‘지은’(명지의 남편이 구하려다 함께 죽은 학생의 누나)의 편지를 읽고 식탁을 잡고 일어서요. (이전 소설집에선) 상상에 기대서 일어섰던 인물들이 그래도 마지막엔 사람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모양새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큰 구원이나 의지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입동’(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에서는 주저앉아만 있었던 인물들이 그래도 마지막에는 식탁을 잡을지언정 일어섰어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상상과 환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좋아하고 이야기꾼으로서 폭신폭신한 허구, 거짓말, 뻥 그런 데 기대는 것도 매우 좋아해요. 앞으로도 그 도구들을 쓸 테지만, 이번 책에서는 사람을 잡고 일어섰다는 점에서 일종의 바람을 담은 것 같아요.

본인을 둘러싼 외부환경이나 감정의 상태가 유기적으로 맞물려서 소설의 분위기가 되기도 하나요?

=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작가마다 이야기를 쓰는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들이마시는 사회적 공기는 작가의 몸에 남는 거라 활자화되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피부에 스며들어요. 의식적으로 쓰지 않았어도 내가 숨 쉰 공기가 문장에 냄새처럼 베었을 거예요.

그게 이번 소설집에서 농담이 사라진 이유인가요?

= 똑같이 힘든 이야기를 하더라도 예를 들면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는 아픈 소년이 자기 상황을 두고 농담을 하거나 부모님을 웃길 수 있었는데, (이번 소설집은 주로) 본인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거든요.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는) 떠날 사람으로서 부릴 수 있는 재치가 있었는데, 이번 소설들은 당사자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농담을 하기가 더 어려웠어요.

유머 감각은 체질과도 비슷해서 동물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는 사라졌다기보다 잠재되어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 안에도 이야기와 관련된 욕구가 있으니까 그때그때 그런 욕구들이 서로 길항 작용을 하는데요, 한쪽의 욕구가 과해지면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어지고, 또 다른 욕구가 강해지면 그에 반하는 방향의 이야기가 쓰고 싶어져요. 또 언젠가는 다른 걸 쓸 거로 생각해요.

전체 작품을 아우르는 주제 중 하나는 '혐오'인데, 다루기 조심스러웠을 것 같아요.

= 사실 앞사람이랑 싸우다가 옆 사람 때문에 다치고 상처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입동’에서도 (아이를 잃은 아빠가 보험회사 직원이라는 이유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하는) 이웃들이 나오죠. ‘가리는 손’에서 화자는 (사고로 아이를 잃은 사촌 언니들에게) 자신의 엄마가 (‘우리 집안 죄받았다 할까 봐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낸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당혹스럽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동남아 출신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이에게는 위로한답시고 ‘재이야, 너희 아빠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야. 공부하러 온 사람이었어’라고 말해요. 그런 식으로 시선을 돌려봤어요. 게다가 그 ‘옆 사람’이 내가 되기도 하지 않나요?

아무래도 어떤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처음 읽었던 그 작가 소설의 화자를 ‘목소리’로 기억하게 되는데, 제 경우에 김애란의 목소리는 ‘달려라 아비’에서 ‘조자옥이 딸이오’라고 외치던 아이였어요. 김애란의 다른 소설을 읽을 때도 그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딸이 주인공이거나, 화자이거나, 관찰자라는 생각으로 읽게 되더군요. 그런데 이번 소설집에는 그 ‘김애란’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그게 아마도 다섯 번째 책이라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얘기들을 그물을 던져서 길어 올리면 됐거든요. 그래서 인물한테 들어가는 속도도 빠르고 쓸 때 막히는 것도 덜 했어요. 그런데 그동안 물고기를 여러 번 잡고 나니 ‘이제 낚시가 아니라 농사를 지어야 하는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까지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어요. 한 걸음 두 걸음 나가서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사회와의 접점도 그리고 하다 보니 처음에 제가 서 있던 곳에서 가장 멀어진 책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그때는 그때대로 좋았어요. 그때의 감각으로만 쓸 수 있는 게 있었죠. 일단은 내가 해결되어야 다른 사람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낚시에서 농사로) 넘어갈 때 작가나 음악가들이 간접경험이나 여행 등의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는 거로 알고 있어요.

= 데뷔 초에는 앉은 시간에 집중하는 일이 많았어요. 그 후에는 물리적으로 앉아있는 시간도 있지만, 글쓰기 전에 글 쓰려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뭘 읽든 어딜 가든 뭘 보든 글 쓰는 몸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물론 쉽게 되지는 않았어요. (변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것과 실제로 ‘되는’ 건 달라서 헤매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했어요. 필요한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해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중략)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 '가리는 손' 中 /<바깥은 여름>

‘가리는 손’에 나오는 회상 중에 화자가 ‘너무 예쁜 합리성’에 대한 반발심을 토로하는 장면이 있죠. 전 그 구절이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처럼 읽히기도 했어요.

= 합리는 소중하고 필요한 거긴 한데요, 인간 자체가 이상하기 때문에 인간이 합리나 논리를 뛰어넘는 선택을 하기 마련이죠. 마지막 소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학생을 구하러 물에 뛰어든 남편의 자기희생도 합리나 논리의 영역을 뛰어넘는 것이죠. 선도 그러고 악도 그래요. 합리가 소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합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을 설명이 되지 않는 상태로 보여주거나 경험하게 하는 게 소설이나 문학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품이 드는 일이에요. 인간은 단순해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죠.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도 열심히 그 사람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지 않잖아요? 그건 당연한 거죠. 그러기엔 다들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일이 많기도 하고요. (그런 이해의 욕구를) 당위처럼 설파하려고 하는 것도, 작가들이 훌륭해서 그걸 해낸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일종의 직업윤리에요.

소설가는 그렇게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모색하다가 결국 실패하죠. 합리의 세계보다 더 섬세해 보이고 더 풍부하게 뭔가를 해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걸로 잘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우리가 그게 뭔지 함께 경험해보고 모색해 보고 그 과정들을 보여주자는 태도. 그런 게 소설가의 직업윤리라고 생각해요.

반드시 실패하나요?

‘반드시’라기 보다는 ‘꽤 자주’ 실패해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욕망에 자주 지기 때문이죠. 자신을 이해할 때도 잘 속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은’, 싶은 마음이 들어요. 제 경우에만 국한해 보면 전 '세계는 이렇고 사람은 이렇다'고 규정하지는 못하고 '세계는 왜 이럴까요? 사람은 왜 이럴까요?'라며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편인 것 같아요.

이런 말들은 작가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생각이거나 작업 과정에서 늘 생각하는 것인데, 제가 혼자 거창하게 말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네요. 기본을 특별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전작에 등장하던 현실(핍진성의 측면에서)을 뛰어넘어 결론짓는 방식도 사라진 것 같아요. '물속 골리앗'에서처럼 세상이 물에 잠긴다든지 말이죠?

=(그런 결론은) 제가 그린 인물들이 작은 방안에서든 작은 공간 안에서든 자기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이었어요. 다른 세계와 만나고 여기가 아닌 다른 데로 가보고요. 저는 환상과 상상도 긍정해요. 세계와 접점을 늘리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의 미덕과 한계가 있어요. 반면에 사실적인 작품들 역시 그것만의 미덕과 때때로의 답답함이 있죠. 제게는 다 소중한 도구들이에요.

개인적으로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김애란 작가가 어떤 ‘단계’에 들어갔다고 이해했어요.

삶도 예상대로 잘 안 살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예상하지 말자는 생각도 드네요. 번번이 과정인 것 같아요. 특히 백지 앞에 앉으면 번번이 어렵고 항상 새 소설 쓰는 것 같고 낯설어요.

‘침묵의 미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쓰지 않던 도구를 쓴 것 같아요.

= 그 소설은 도구보다는 욕구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침묵의 미래’가 딱 비행운을 묶고 나서 쓴 소설이에요. (당시) <비행운>을 묶고 나서 지쳐있었어요. <비행운>에도 현실적인 소설들이 많아서이기도 했고, 네 번째 책이다 보니 ‘그동안 아는 방식으로 아는 이야기를 썼다면 한번 모르는 이야기를 모르는 방식으로 써보고 싶다’는 욕구로 써본 소설이에요.

흔히들 (현실적인 소설과 관념적, 환상적인 소설을 구분해) 땅과 하늘로 비유하고 하는데, 좀 점프해서 고도를 바꾸고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서 폐활량을 좀 크게 늘려서 독자들에게도 좀 다른 공기를 마시게 하고 싶었어요. (그 욕구에는) 기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사랑도 있을 거예요.

김애란의 문장이 리드미컬하고 가독성과 완결성이 뛰어나다는 말을 많이들 하죠. 그런 아름다운 문장이 이번 소설을 쓸 때는 독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그런 문장이 장식적이거나 수사적인, ‘문장을 위한 문장’인 경우라면 더 많은 주저나 고민을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소설에 기여하는 문장이거나 표현이라면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것 역시 소재나 인물을 대하는 예의만큼이나 소설의 내적 윤리에 포함되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이런 면들이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때때로 상충하기도 하죠.

정지돈이나 손보미 등 다른 동년배 작가들은 전혀 다른 결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 문체나 스타일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요. 문체(文體)라는 단어에는 ‘몸체’ 자를 쓰는데 우린 다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났고, 다른 역사와 다른 호흡을 가지고 있어서, 가수들의 목소리가 다 다른 것처럼 그 작가 몸에서 나오는 고유한 문장이 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몸이 다른 문제를 그리고 그 몸이 선택하는 이야기의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고, 그 작가 호흡에 맞는 그리고 그 작가의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체를 고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소설이나 문학 등 활자 매체들이 하는 일 중의 하나는 단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다르게 ‘감각해주는 몫’이라고 생각해요. 수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다르게 표현해 세계와의 접촉면을 늘리고 세계를 풍부하게 감각하게 하는 게 소설의 복무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에 장식이 있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문장을 기본으로 하는 작가가 문장으로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를 했다고 여겨주면 좋겠어요.

이 고민도 국적은 다르고 시대는 다르지만 오랜 시간 작가들이 해온 고민 중의 하나일 거예요. 비슷한 고민을 사진가도, 기자도, 미술가도 할 거로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몹시 어려운 문제고, 쉽게 답이 있는 게 아니라서 지금까지 반복되며 내려온 고민이기도 하죠. 저 역시 그 안에서 뭔가를 모색하는 거지 정답의 자리에 앉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번 소설집에는 장편으로 생각했던 작품이 세 개정도 있는 거로 들었어요.

‘침묵의 미래’ 같은 경우에는 작은 ‘세계’를 그린 작품이라, (현재의 단편 안에는) 한두 줄로 요약된 각 부족의 사연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작품이라 몸집을 불리면 도리어 유치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처럼 찰나로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렇지만, 소수민족 관련 자료도 보고 언어 관련 자료도 보고 준비는 좀 했었죠. 세계에 6천 수백 개의 언어가 있는데 장편으로 했을 때 신이 아닌 이상 쓸 수 없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노찬성과 에반’도 장편으로 생각했었고, ‘건너편’이라는 작품 역시 장편으로 고려했어요. 배경이 되는 ‘서울’이 이야기가 풍부하고 겹이 많은 공간이라서요. 이 광화문만 하더라도 아스팔트 아래 한국전쟁 때 쌓인 유골이 있고, 그 아래 토기가 묻혀 있는 식으로 켜켜이 쌓여있을 거예요. 소설에도 등장하는 목교진포(나들‘목’, 양화’교’, 노량’진’, 영등’포’) 등의 공간을 더듬어 가면서 ‘이것도 좀 크게 불려볼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혹시 장편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도 느끼나요? 일각에선 단편을 마치 장편의 습작으로 여기는 시선도 있죠.

장편과 단편은 달라요. 매력도 다르고 쓸 때의 재미도 다르죠. 제가 신경 쓰는 건 압박이나 기대보다는 욕구에요. 크게 불려보고 굴려보고 놀아볼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이야기 충동’ 그런 충동이 드는 이야기와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아예 신경을 안 쓴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사실 한 치 앞을 보고 사는 사람이라 제 앞에 있는 소설에 압박을 가장 크게 느껴요.

대신 장편은 아무래도 시간이 있으니까 주머니 안에 든 호두알 만지듯이 만지작만지작하며 뒤에 좀 치워 놓기는 해요.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거죠.

(이번 소설집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은 뭔가요?

가장 최근에 발표한 게 '가리는 손'이라는 작품인데, 가장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어떤 변화를 감지하게 된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한 세대에 집중해서 ‘나’ 혹은 ‘우리 세대’ 안쪽으로 시선이 향하고 그에 대해 주로 얘기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고 제가 나이 들면서 폭이 생긴 느낌이 들어요. 앞 세대와 뒷세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는 폭, 공간이 생긴 느낌이에요. 그러자 그 공간 안에서 볼 수 있는 것, 감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생겨요. 감각이 달라지면서 말 그대로 ‘겹이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앨리스 먼로 같은 단편 소설의 거장들을 보면 나이가 들고 다루는 세대의 폭이 넓어지며 레이어가 생기더군요.

앞서 ‘무거워졌다’는 얘기를 들은 이유 중 하나일 것도 같아요. 나를 그리거나 20대의 인물을 그릴 때는 아직 사회로 진입하지 못한, 혹은 유예된, 무결하고 실제로도 책임이 적은 인물들이 등장했다면, 이제는 '풍경의 쓸모'에 등장하는 것처럼 얼룩을 감내하고 사는 인간들이 나와요. 착하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데 굉장히 사소하고 흔한 잘못들을 저지르고 다니는 보통의 성인들이 소설에 등장하면서 무결한 인물들이 줬던 쾌활함과 에너지가 그만큼 소설 안에서 줄어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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