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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도적 역할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북한이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 분명 다양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북한이 새로운 미래를 보지 못하고, 과거의 관성에 따라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문재인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북한이 지금 억지력을 높여 얻을 것은 많지 않다. 한-미 정상회담은 그동안 길을 잃었던 북핵 협상이 다시 궤도로 재진입할 수 있는 계기다. 북한이 9년 만에 만들어진 궤도 수정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Jim Bourg / Reuters

한-미 정상회담이 끝났다. 무난한 출발에 박수를 보낸다. 공동선언문에 아쉬운 점도 모호한 부분도 충돌하는 항목도 있다. 그러나 '성급한 조율'보다 '신뢰의 기반'을 선택한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만남이기 때문이다. 갈 길이 먼데 처음부터 차이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외교는 정상회담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정상의 신뢰는 그만큼 중요하다. 신뢰가 쌓이면 얼마든지 차이를 조율할 수 있고, 모호한 합의를 구체화할 수 있다.

합의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다.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이 움직일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다. 한반도 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북-미 삼각관계가 선순환해야 한다. 한-미, 남북, 북-미라는 세 개의 양자관계에서 하나라도 막히면 다른 관계는 앞으로 나가기 어렵다. 한국이 나서고 조율하고 대안을 제시해서, 세 개의 양자관계가 서로 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처음으로 합의한 것은 노태우 정부 때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을 만나 '남북대화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또한 '북핵도 남북문제이므로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과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반도 질서를 주도하지 못했다. '주도적 역할'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한국이 주도하여, 남-북-미 삼각관계를 선순환시킨 것은 딱 두 번이다. 한번은 2000년이고, 다른 한번은 2007년이다. 두 번 모두 한국이 주도하여, 한-미 공조로 대북정책을 조율하고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중재하고 북핵문제의 해법을 마련했다.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은 우연이 아니다. 알고 보면 정상회담의 결과인 6·15와 10·4 합의는 남-북-미 삼각관계의 선순환 결과다.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북한이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 분명 다양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북한이 새로운 미래를 보지 못하고, 과거의 관성에 따라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문재인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북한이 지금 억지력을 높여 얻을 것은 많지 않다. 한-미 정상회담은 그동안 길을 잃었던 북핵 협상이 다시 궤도로 재진입할 수 있는 계기다. 북한이 9년 만에 만들어진 궤도 수정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단지 자존의 표시가 아니다. 이제 외교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실패한 외교'의 시각으로 '뒷다리를 잡는 낡은 시각'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한·미 정상은 이번에 한목소리로 과거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실패했음을 선언했다. 9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 정도면 정책의 효용성을 평가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아직도 과거의 실패한 정책을 계속하라는 주장들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창의적이고 복합적인 새로운 해법이다.

너무 상황이 악화되어 여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악화의 시간'에 생긴 상처들을 아물게 하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언제나 외교의 힘은 국내의 지지에서 나온다. 한-미 간의 다층적 협의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국내적으로 지혜를 모을 때다. 외교안보 분야를 정쟁의 도구로 삼았던 적폐와 헤어질 때가 왔다. 갈 길이 멀고, 우리는 하나의 고개를 넘었다. 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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