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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라면 모두 LGBT+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인정하고 지지해야 한다

지난주, 나는 남침례회연맹에서 '미국의 믿음'(Faith in America, 종교와 LGBT 인권을 지지하는 단체)와 함께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만났다. 가정과 교회에서 성소수자 아이들이 받는 엄청난 피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우리는 무더운 피닉스의 인도에서 팸플릿을 나눠주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통계와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대화를 나누려 애썼다. 교회에서 성소수자 어린이들이 받는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화에 참여한 우리 단체 회원들은 규칙도 어기지 않았고 전단지를 나눠주지도 않았지만 쫓겨났다. 하지만 나는 동료들의 열정, 품위, 사랑에 감동 받았다.

내게는 유달리 개인적으로 느껴진 일이었다. 내가 성소수자이며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불과 8주 전, 목사였던 나는 직업을 잃었다.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서 쫓겨난 것은 고통스러웠다. 이 교파는 내 신앙의 요람이자 내 삶의 기반이었다. 아주 간단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성소수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대학교 때 내 친구가 내게 커밍아웃한 이후 내내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었던 의문이었다. 그 후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가가 되었을 때, 나는 차별과 소외의 영향과 내면의 작용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여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게 되자, 이 문제는 내게 있어 더욱더 중요해졌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수치를 느꼈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숨겨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혼자서 생각할 때조차도 퀴어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를 계속 거부해 왔지만, 올랜도의 펄스 나이트클럽에서 49명이 사망했을 때는 정말이지 우울해졌다. 퀴어 커뮤니티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포를 느꼈다.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내가 퀴어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목사 동료들 중 이 비극으로 인해 자기 탐구에 빠져든 건 나뿐이었다. 내 의문은 심각해졌다. 어떻게 하면 성소수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혹은 그 어떤 종교에 건강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나는 그때도, 지금도 믿는다. 그래서 동성애를 죄로 간주하는 종교의 근본적 토대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최근에 보수적 기독교 시각에서 이를 새로 해석하는 훌륭한 학문적 연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동성 간의 성행위가 착취적이며 유해한 행동이라는 것이 성경에 언급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적용하는 방법의 차이는 신학자들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점에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성소수자를 부정하는 신학자들이 사원의 매춘부들과 착취당하는 소년들에 대한 텍스트가 고대의 성소수자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받았다. 그들은 건강하지 못하고 통제 불능인 ‘게이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곤 한다. 신학대학의 교수들이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게 기억났다. 최소한 그들은 학대와 착취에 관한 이런 텍스트들을 거리낌없이 오늘날의 성소수자에게 적용했다. 그들은 동성간의 사랑을 이성애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다. 나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들이 멋대로 성서를 그들의 삶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향을 받는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뭘까? 성소수자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신학은 변화하지 않고 버티려 한다. 그들은 동성 결혼과 성전환이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아담은 남성으로, 이브는 여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오직 그러한 결혼만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연민과 정의라는 성서의 큰 가치를 우려하는 게 아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조직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동성 결혼이나 성전환을 금지하는 구절은 성경에 없고, LGBT+ 커뮤니티에 명백한 해가 가는데도 그들은 규탄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고, 내 섹슈얼리티를 포용하지 못하게 했던 모든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도를 하며 내 마음을 신에게 열자 순수한 기쁨을 경험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웃었다.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양성애자다. 이건 아름다운 선물이다.

내 절박한 질문에 대한 대답도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LGBT+가 사랑하는 방식, 그들의 정체성을 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다. 교회는 퀴어 커뮤니티를 인정하고, 지원하고, 존중할 수 있다. 예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사랑이 가득한 척한다 해도, LGBT+가 죄를 짓고 있다고 낙인을 붙이는 신학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고 파괴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규탄 행위를 ‘사랑’이라고 부르곤 하지만, 그건 이슈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이것을 깨닫자 LGBT+ 인정을 금하는 지도자 위치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충실한 삶을 살기로 했다.

더 이상 내가 성직자로 있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이 교파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다.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LGBT+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멸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 이러한 잘못 때문에 그들은 신뢰성을 잃고, 교회에 대한 참여도 줄어든다. 그들은 사회가 죄를 용납한다고 비난하지만, 내 교파보다는 사회가 나를 더 아낀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하다.

희망은 있다. 약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예수의 일을 잇는 데에 희망이 있다.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내친 모든 사람들을 포용했다. 현재의 예수 추종자들도 그렇게 한다. 전통적인 교회는 신앙의 핵심을 회복하려거든 반드시 퀴어들을 포용해야 한다. 여성, 유색인종, 빈민층에게도 지도부 자리를 주고 존중해야 한다. 사회가 보기에 교회는 진실성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해야만 진실성을 되찾고 세계에서 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예수의 신앙은 다시 한번 더 이 세상에서 희망과 연민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남부 침례교도들과 일 대 일로 이야기하고, 힘든 대화를 나누고,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나는 희망을 보았다. 괴로웠느냐고? 그랬다. 어려웠냐고? 어려울 때가 많았다. 보람이 있었나? 있고말고. 나는 내 자신이 예수의 일을 하고 있음을 지난주 만큼 확신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중요하고, 그들의 신학이 얼마나 파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교단의 도덕적 진실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예수의 일을 맡고 LGBT+를 인정한 교단들도 많다. 보수적인 교단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퀴어와 지지자(Ally)들은 보수적인 교회들 역시 사랑, 연민, 정의가 신앙의 핵심이라고 가르쳤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걸 일깨워줘야 한다.

 

허프포스트US의 'All Christians Should Support And Affirm LGBT+ Sexuality And Gender'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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