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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에 관해 글쓰기

나는 안경환씨가 이 책에서 남자의 성매매와 외도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안경환씨의 글에서 남자는 늘 하나 이상의 서사를 얻고 있지만 여자는 늘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남자의 서사가 손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남자들의 행동거지가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벌써 풍속의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풍속이 만들어주고 승인해주는 남자들의 습관은 자주 남자들의 생리나 본성과 혼동되기 때문에 반성을 해도 그 반성의 효과는 없다. 생리와 본성을 어떻게 철저하게 반성할 수 있겠는가.

제목에는 '풍속'이라고만 썼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남자의 풍속'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런데 내가 말하려는 것이 정말로 풍속일까. 차라리 남자의 전설이나 남자의 신화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남자는 여자와 어떻게 다른가'를 주제로 내걸고 전개하는 모든 종류의 언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남자는 여자와'는 '남자와 여자는'과 크게 다른데 앞의 말은 뒤의 말과 달리 어디까지나 남자가 그 주제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며, 남자들을 위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그 주제 아래 펼쳐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여자들을 불편하게 하지만, 남자들에게도 항상 편한 것은 아니다. 남자는 여자와 달라야 할 것 같은, 그리고 그 다름에 대해 말해야만 할 것 같은 이중의 강제성을 그 이야기들이 움켜쥐고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이런 주제의 이야기가 철이 든 이후 내 삶에서 농담이 아닌 방식으로 제시되어 나를 압박했던 것은 군인으로 생활할 때가 처음이었다. 한국 군대에는 '진짜 사나이'라는 군가도 있지만,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남자가 남자다워야 한다는 주장은 온갖 무리한 명령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할 뿐만 아니라 늘 그렇게 말함으로써 외부의 비열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폭력적 세계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이고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군대에서 듣게 되는 모든 언설은 우리를 정말로 심각하게 압박하지는 않는다. '여기는 군대니까'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우리가 군인으로 살아야 하는 시간은 길건 짧건 정해져 있다.

저 철학과 형이상학이 좀 더 세련된 모습을 띠고 나타난 것은 내가 첫 직장 생활을 할 때였다. 나는 전역 후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한 월간지에서 잠시 편집자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 잡지는 걸핏하면 '심층분석 남자' 같은 특집을 꾸몄다. 한번은 아이가 둘인 편집장이 '남자의 세계'라는 특집을 제안하며 '남자에게는 아내도 가족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만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게는 그런 세계가 없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지만 아직 미혼이어서 그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을 때도 남자의 세계와 관련된 내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우연히 장욱진 화백의 전시회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림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화제가 '밤'이었을 것이다. 반달이 떠 있는 밤에 한 집의 내부에 가족들이 쓰러져 자고 있는데 가장일 것이 분명한 한 사내가 집 밖에 나와 홀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그 사내는 '아내도 가족도 모르는 남자만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림은 앞에서 말한 그 철학과 형이상학의 미학적 결정판처럼 보였기에 나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나는 내게 딱히 남자다운 세계나 남자만의 세계가 없는 것은 내가 문학을 공부하며 시나 소설 같은 '나약한 것'에 심취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더구나 나는 여학생이 많을 뿐만 아니라 늘 두각을 나타내는 불문학과에서 공부를 하였기에 오직 남자만이 해야 할 일이 내 생애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문학이 '남녀평등의 문학'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문학사조가 프랑스 문학에서 비롯하듯이 모든 문학적 여혐의 형식도 프랑스의 시와 소설에 그 연원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많은 예를 들 것도 없이 소설 속의 에피소드들만 한두 개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한 소설에서 사춘기를 갓 넘어선 주인공은 군대에 입대한 직후 면회 온 어머니를 돌려보내며 다른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그 등 뒤에 감자를 먹인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남자다. 소설 속의 이 장면은 풍자가 아니다. 셀린은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몽테를랑의 소설은 이런 에피소드를 넘어선다. 그의 소설은 거의 모두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유혹하여 성적으로 굴복시킨 후 그 여자를 버리는 이야기다. 그것이 저 찬란한 프랑스문학 한복판에서 개화한 남자들의 풍속도이기도 했다. 몽테를랑도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남자만의 세계가 남성적 폭력의 세계이며, 그 대대적인 폭력이 여성혐오의 극단적 확장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늘 실권을 장악하여 왔다. 권력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그 남성적 세계의 외부를 대상화하기 마련인데, 그 대상화된 세계가 이번에는 남자만의 세계를 승인하고 만다. 한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여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 수동적 존재들을 통해서 남성적 세계의 적극성이 확인된다는 말인데, 남자다운 세계는 남자답지 않은 세계를 끝없이 생산할 때만 존속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에 바로 남자다운 세계의 아이러니가 있다.

안경환씨가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었을 때 그의 책 〈남자란 무엇인가〉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나는 저자의 선의를 믿으며, 그가 이 책을 통해 인권의식을 드높이려 하였다는 고백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 책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남녀 간의 갈등을 운명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우리의 '생각의 역사'를 한 치라도 높이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안경환씨가 이 책에서 남자의 성매매와 외도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안경환씨의 글에서 남자는 늘 하나 이상의 서사를 얻고 있지만 여자는 늘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자는 그 서사 밖에서 타자가 되어 있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재난인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운 사람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을 때는 남군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남자의 서사가 손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남자들의 행동거지가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벌써 풍속의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풍속이 만들어주고 승인해주는 남자들의 습관은 자주 남자들의 생리나 본성과 혼동되기 때문에 반성을 해도 그 반성의 효과는 없다. 생리와 본성을 어떻게 철저하게 반성할 수 있겠는가. 남자들의 권력행사가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는 것은 그 권력의 힘이 일상의 미세한 틈에까지 스며들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풍속이 되어 이미 팽배해진 이 권력에서는 그 팽배함이 오히려 구원의 인자로 작동할지도 모르겠다. 바타유는 〈에로티슴〉에서 성행위를 '내적 충만함의 방출'로 정의하기도 했다. 생명은 늘 충만함을 지향하기에 그 방출은 위반과 탈선에 해당한다. 그리고 위반과 탈선은 죽음과 연결된다. 성행위로 체험하는 이 짧은 죽음은 개인적인 관점에서도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한 풍속의 전면적 쇄신의 은유일 수 있다. 한 사람이 풍속에서 빠져나와 그 풍속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그의 삶과 의식을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일이다. 흔히 말하듯 개혁은 죽음이자 동시에 부활이다. 선의를 얻기는 쉽지만 쇄신은 어렵다. 죽음은 어느 경우에나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살아서는 은유로만 체험된다. 안경환씨의 책에서 보게 되는 이상한 비관주의, '남자는 이렇게 생겨먹었다'로 표현되는 비관주의는 이 실천해야 할 쇄신 앞에서의 망설임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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