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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그렌펠타워 화재와 세월호

불탄 건물에서는 이제 더이상 검은 연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붕괴 위험 때문에 시신수습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시신을 발견해도 신원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경찰은 실종자를 전원 사망자로 간주하고 현재까지 사망자 수는 79명이라고 추산했다. 사람들은 정부의 희생자 집계를 믿지 않는다. 희생자는 백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본다. 가족과 친지들은 건물 밖에서 오열한다. 재난의 현장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가도 찾을 수 없다. 다 타버렸다. 애통해하는 주민들에게 정부는 책임 있는 설명도 상세한 경과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분노에 차서 구청으로 몰려가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선다. 잔인한 기시감이다.

  • 이향규
  • 입력 2017.06.22 11:49
  • 수정 2017.06.22 12:02
ⓒDan Kitwood via Getty Images

많이 닮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여느 날과 같이 생활하다가 집단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데서, 그게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는 점에서, 자본의 논리가 깊숙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그걸 사람들이 TV로 생생히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세월호참사와 영국의 런던 그렌펠타워(Grenfell Tower) 화재는 닮았다.

한밤중에 어느 집에서 우연히 발화된 불꽃이 순식간에 24층 건물을 태웠다. 그리고 이것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도시재앙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었다. 런던 한복판에 서 있는 검게 탄 이 건물은 여러 상징을 담고 있는 연극 세트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사람들의 분노와 애통함은 안타깝게도 현실이다. 이 '후진국적 인재'가 믿기지 않아서,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21세기 런던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이런 일이 21세기 런던이니까 일어났을 거'라고, '이윤'이 가치판단의 중심이 되면, 그 비슷한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이 안전보다 우선하는 모든 곳이 세월호이고 그렌펠이다.

발생 배경, 전개 과정, 잔인한 기시감

고층 아파트는 영국의 일반적인 주거공간이 아니다. 이런 타워블록은 1960~70년대 노동계급의 주거 문제 해결책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의 흉물처럼 되었고, 이곳에 사는 것은 가난의 상징같이 되었다. 그렌펠타워도 1974년에 건설되었다. 런던 켄싱턴-첼시 구청이 소유하고 있는 공공주택이다. 이 지역은 런던에서도 가장 불평등이 심한 곳 중 하나다. 극단적인 부와 빈곤이 공존한다. 그렌펠타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 이 24층 건물 한 동에 120개의 작은 칸막이 집(Flat)들이 있고 이 벌집방 같은 플랫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이주민이나 노동계급이다. 입주자단체는 이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것을 여러번 구청에 알리고 시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2015년에 리모델링을 했지만 그것은 미관공사였다고 한다. 가난함이 드러나지 않게 밖을 치장하는 게 우선시되었다. 그때 외벽에 불연성 자재 대신, 평방미터당 2파운드(약 3천원) 더 싼 가연성 자재를 썼다. 결국 이 외장재는 건물 전체를 태우는 연료가 되었다. 건물 내부의 안전관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소화기 점검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불이 났을 때 화재경보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입주자용 화재시 안전지침에는 "가만히 있으라"고 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부자들의 거주지였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한다.

사고의 발생 배경도 닮았지만, 이후 전개 과정은 더욱 비슷하다. 화재는 6월 14일 새벽 1시에 발생했다. 내가 14일 아침에 TV 뉴스에서 생방송 화면을 볼 때도, 건물에는 불꽃이 보이고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여기서도 온 국민이 그 재난 장면을 몇시간째 TV로 보고 있었다. 안타까움과 무력감, 슬픔과 우울감이 온 사회를 덮었다. 그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테레사 메이 총리는 하루가 지난 다음날 현장을 찾았다. 그녀는 주민도, 현장에서 사투를 벌인 소방관도 만나지 않고, '깨끗한 옷을 입은' 소방서 간부만 만난 후 돌아갔다. 사람들은 격분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다음날 다시 가서 주민을 만나고, 그다음 날엔 총리공관에 주민대표 등을 부르기도 했지만, 이미 그녀를 향한 비판은 되돌리기 어렵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책임이 있었다. 보수당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공공부문 예산 삭감을 강행해왔다. 그게 이 공공주택의 안전관리를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불에 기름을 붓듯,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지도자의 태도는 울분을 격노로 바꾸어버렸다.

구청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다. 14일부터 이 지역은 자원봉사자들과 기증한 물건들로 넘쳐났다. 소식을 듣고 가까이서 멀리서 음식과 옷, 휴대폰 충전기, 담요 등을 들고 온 사람들이 줄을 섰다. 꽃다발도 쌓였다. 사람들은 뭔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연대감을 표시하고 싶어서 모였다. 뉴스리포터가 자원봉사자들에게 물었다. "켄싱턴-첼시 공무원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침부터 있었는데 한명도 못 봤어요." 차마 외면하지 못해서 모여든 보통 사람들과 마땅히 제 역할을 해야 하는 공공영역의 침묵. 그걸 우린 가슴이 찢어지며 봤었다. 우리의 민간 잠수사들은 그때 목숨을 걸었었다. 그리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6월 17일은 고 김관홍 잠수사의 1주기 기일이었다. 많은 것들이 3년 전의 일들을 생각나게 했다.

불탄 건물에서는 이제 더이상 검은 연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붕괴 위험 때문에 시신수습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시신을 발견해도 신원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경찰은 실종자를 전원 사망자로 간주하고 현재까지 사망자 수는 79명이라고 추산했다. 사람들은 정부의 희생자 집계를 믿지 않는다. 희생자는 백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본다. 가족과 친지들은 건물 밖에서 오열한다. 재난의 현장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가도 찾을 수 없다. 다 타버렸다. 애통해하는 주민들에게 정부는 책임 있는 설명도 상세한 경과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분노에 차서 구청으로 몰려가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선다. 잔인한 기시감이다.

관계의 회복, 정의의 실현을 바라며

6월 17일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 기념식이 있었다. 그녀는 공식연설에서 "오늘은 전통적으로 축하하는 날이지만, 올해는 침울한 국가적 정조(sombre national mood)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침울한 국가적 정조, 우리도 그걸 몇달 동안 보냈다. 그 말을 할 때도, 그 전날 그렌펠타워의 희생자들과 소방관들을 만날 때도, 그녀의 눈에는 깊은 걱정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90이 넘은 이 노 군주의 얼굴을 보는데, 난데없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리고 마음은 슬픈데, 그 슬픔이 이해받는 것 같은 위로도 같이 느꼈다. 그녀는, 우리 모두는 슬픔 안에 하나 되어, 이 상처와 상실로 끔찍하게 고통받은 모든 이들의 삶이 다시 재건되도록 지지한다고 했다. "두려움(fear)이나 선호(favor) 없이" 똑같이 결연하게. 테러로 어수선하고 인종적, 종교적 갈등이 부글거리는 지금, 나는 여왕이 '두려움이나 선호 없이 똑같이' 함께한다는 말을 해줘서 고마웠다. 상징이어도 좋다. 고통받은 이들의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고, 함께 극복하자고 말하는 지도자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내가 다니는 이스트본 성당에서 신부님은 강론을 하면서, 그렌펠타워에서 무너져 내린 것 중 하나는, '관계'(relation)라고 했다. 신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주민과 국가권력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훼손되었다고. 이것을 회복해나가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릴 거다. 우린 3년이 지나면서 이제 겨우 그 회복을 시작하고 있다. 이곳은 어떻게 될지, 앞으로의 과정도 닮아 있을지, 런던 시내에 모여드는 시위대의 구호처럼 이곳에서도 "진실규명"과 "정의실현"이 이루어질지. 이곳에서도 회복이 시작되기를, 그리고 겨우 시작된 우리 사회의 회복이 멈춰 서지 않기를 기도했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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