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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세월호' 그렌펠 타워 | 정치는 왜 오판을 반복하는가

무슬림 이민자, 독거노인 그리고 가난한 예술인과 같은 사회 최하층이 채우는 120가구 무려 24층짜리 아파트가 겨우 1시간 만에 거대한 불기둥으로 타버린 것은, 부자동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플라스틱 외장재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사회통합은커녕 그들 눈에 임대주택은 당장 걷어 내버리고 싶은 흉물에 불과했는지 모릅니다.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총리는 참사 현장 방문에도 유가족을 만나지 않았고 BBC 인터뷰에선 '뭐가 문제인지는 안다'는 투로 일관하며 화를 자초합니다.

영국 런던의 24층 아파트인 '그렌펠 타워'가 불타는 모습. 약 600여 명의 주민이 그렌펠 타워에서 생활했다. © wikimedia

런던 켄싱턴과 첼시 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의 제일 비싼 주거지역 중 하나입니다. 1967년에 지어진 공공임대 아파트 그렌펠 타워는 부자와 빈자가 공존하는 사회 통합의 상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무슬림 이민자, 독거노인 그리고 가난한 예술인과 같은 사회 최하층이 채우는 120가구 무려 24층짜리 아파트가 겨우 1시간 만에 거대한 불기둥으로 타버린 것은 그러나, 부자동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플라스틱 외장재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난 7년, 재정 긴축을 명목으로 매년 지방 정부의 예산을 삭감해 온 보수당 정부였습니다. 구청 소유의 임대주택은 겨우 몇 천 파운드의 비용 절감을 위해 600명 가까운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 잡은 셈입니다. 사회통합은커녕 그들 눈에 임대주택은 당장 걷어 내버리고 싶은 흉물에 불과했는지 모릅니다.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총리는 참사 현장 방문에도 유가족을 만나지 않았고 BBC 인터뷰에선 '뭐가 문제인지는 안다'는 투로 일관하며 화를 자초합니다.

오만과 편견

2017년 6월 14일, 안 해도 될 조기 총선을 굳이 치르더니 집권 보수당은 과반의석을 잃고 연정 파트너를 구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렌펠 타워 사태로 총선 실패는 지나간 이야기가 됐고 브렉시트 이슈도 휩쓸려 가버렸습니다. 도대체 정치는 왜 이렇게 오판을 반복하는 걸까요? 지난 10년, 연거푸 선거에서 참패를 기록하고 이번 총선에서 극적으로 부활한 노동당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오판'에 관한 한 그동안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 대표를 왕따시켜 온 주류 정치인, 엘리트 언론 모두가 똑같습니다.

지난주 코빈의 주도로 치른 첫 총선에서 노동당은 1당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기존보다 32석을 늘렸습니다. 보수당이 조기총선의 깃발을 든 결정적 이유는 브렉시트 협상을 빙자해 노동당을 완전히 짓밟을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오히려 선거는 뒤집어진 겁니다. 코빈과 당내 좌파 일부 만으로 단 40여 일 동안 노동당 지지도를 무려 25% 가까이 끌어올렸습니다. 선거 2주 전만 하더라도 노동당이 좌파 스코틀랜드 정당 SNP로부터 의석을 되찾아 올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영국 제1야당인 노동당의 당수 제레미 코빈. 그는 당 내 '아웃사이더' 혹은 '주류 세력의 적'으로 불린다. © wikimedia

영국 총선 결과. 보수당(그래프에서 파란색)은 노동당(그래프에서 빨간색)보다 57석을 더 확보하며 승리했지만, 과반을 얻지 못해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 BBC 캡처

당장은 그동안 그의 내각에 동참하지 않겠다던 노동당 주류들의 태도가 바뀔 수도 있지만 이런 분위기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 보는 전망이 많습니다. 그렌펠 타워 사태로 조금은 미뤄지겠지만 주류 언론과 기득권 정치사회가 다시 손을 잡는데 반년이면 충분하다고들 합니다. 엘리트로 구성된 정치와 정부, 오직 '체제의 재생산'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정당정치의 한계, 사람들과 함께 하기보다 '인물'을 소비하는 기득권 정치의 한계입니다. 그들에게 공화(共和)의 열정이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권리' 위에 '가만히' 있는 국민은 이제 없다

정치사회의 눈이 시민의 담론을 읽어내지 못할 때 파국은 불가피합니다. 선거와 투표의 '권리(rights)'는 수동적이고 조직되기 힘들지만 사람들의 '요구(claims)'는 포말을 터뜨리는 파도와 같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권리' 위에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국민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실감 나는 삶의 구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그것이 21세기의 정치, 작동하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견지해야 할 최우선입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 © Wikimedia

브렉시트와 트럼프는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포퓰리즘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의 오판이 계속된다면 사람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말 것입니다. 한국이 그 예죠. 시작은 세월호였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우리는, 극소수의 비리가 아니라 시스템의 총체적 무능과 부패가 이해하기 힘든 모든 일들의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에 그로테스크하게 솟은 가난한 자의 무덤, 그렌펠 타워가 영국의 세월호가 될 수 있을까요? 고층 건물에 플라스틱 외장재 사용을 금지하는 규제는 영국에도 있습니다. 문제는 특정한 정책의 유무가 아니었던 겁니다. 어떤 정책 애플리케이션도 작동하지 않는 낡은 운영체제(OS, 오퍼레이팅 시스템) 그 자체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세월호를 겪고 촛불항쟁과 대통령 탄핵 그리고 정권교체를 이룬 대한민국은 지금,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이 아니라 낡은 운영체제를 바꾸는 중이라는 사실,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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