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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주인들은 역사에서 손 떼라

정작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결성된 '동북아 역사 왜곡 대책 특별위원회'가 그것이다. 위원회가 '위대한 상고사'를 꿈꾸는 일본 군국주의나 나치의 파시즘적 역사관에 가까운 사이비 역사 해석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도 하나의 해석이다. 문제는 고구려와 한사군의 영역을 둘러싼 역사가들의 동북아 역사 지도 논쟁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판결'을 내리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로 내정된 도종환 의원이 이 위원회에서 하버드대의 고대 한국 프로젝트나 동북아 역사 지도 폐지에 맹활약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임지현
  • 입력 2017.06.12 10:13
  • 수정 2017.06.12 10:24

나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프로젝트에 반대했다. 반대 서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지난 정권을 치장하던 학문 권력들의 '알아서 기는' 블랙리스트에 걸려 불이익을 받은 바도 있다. 덕분에 권력이 역사 해석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가로서 소신은 더 굳어졌다. 그때 집필된 국정교과서가 설혹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판단이 들어도, 반대하는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옳고 그름이나 해석의 적정성 문제가 아니다. 국정교과서 밑에 깔려 있는 발상, 즉 권력이 역사 해석을 '독점'한다는 그 발상이 문제인 것이다.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어떤 정권도 특정한 코드의 과거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 과제에 포함하라고 지시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문득 떠오른 상념이다. 보도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영호남에 걸쳐 있었던 가야사 연구를 통해 지역감정을 넘어 영호남 통합의 물꼬를 트겠다는 문제의식에서 가야사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한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 과제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했다. 뉴스1

문 대통령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이 가진 지나치게 소박한 역사의식은 문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영호남 통합을 위해 가야사를 연구해야 한다면, 가야국 내부의 갈등이나 분열은 무시하자는 이야기인가? 고대의 연합 왕국이 특정 지역에 있었다고 해서 역내 평화가 자리 잡았다고 볼 이유는 없다. 사람 사는 데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분열과 갈등은 통합과 협력 못지않게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영호남 통합을 위한 가야사 연구를 촉구한 대통령의 제언은 남북 화해를 위해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갈등과 전쟁은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야사 연구와 복원'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내 제안은 이렇다. 문 대통령이, 현실 정치는 역사 해석에서 손을 떼어야 하며 앞으로 모든 청와대 주인들도 이를 관행으로 삼자고 제안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리된다면, 가야사 논란은 본인 말대로 '뜬금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에피소드로 넘어갈 수도 있다.

정작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결성된 '동북아 역사 왜곡 대책 특별위원회'가 그것이다. 위원회가 '위대한 상고사'를 꿈꾸는 일본 군국주의나 나치의 파시즘적 역사관에 가까운 사이비 역사 해석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도 하나의 해석이다. 문제는 고구려와 한사군의 영역을 둘러싼 역사가들의 동북아 역사 지도 논쟁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판결'을 내리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로 내정된 도종환 의원이 이 위원회에서 하버드대의 고대 한국 프로젝트나 동북아 역사 지도 폐지에 맹활약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사회의 기억 문화가 영화, 소설, 드라마, 박물관, 미술관, 만화, 인터넷 게임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화부는 교육부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 담론의 생산자이다. 국회 특위에서의 판관 경험과 결합한 그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이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보수적 정치관에도 시리아 난민 문제 등에 대해 가장 진취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뒤에는 2017년 토인비상을 받은 글로벌 역사가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조언이 있었다. 유럽 자체가 대규모 이민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독일 정치와 한국 정치의 차이는 역사가 오스터함멜과 사이비 역사학자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에 지명된 도종환 의원이 5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 이 글은 조선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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