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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복원 지시, 본말의 전도

SEOUL, SOUTH KOREA - JUNE 06: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speaks during a ceremony marking Korean Memorial Day at the Seoul National cemetery on June 6, 2017 in Seoul, South Korea. South Korea marks the 62th anniversary of the Memorial Day for people who died during the military service in the 1950-53 Korean War.  (Photo by Chung Sung-Jun/Getty Images)
SEOUL, SOUTH KOREA - JUNE 06: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speaks during a ceremony marking Korean Memorial Day at the Seoul National cemetery on June 6, 2017 in Seoul, South Korea. South Korea marks the 62th anniversary of the Memorial Day for people who died during the military service in the 1950-53 Korean War. (Photo by Chung Sung-Jun/Getty Images) ⓒChung Sung-Jun via Getty Images

“이건 불통이다. 그의 ‘지시’는 사려 깊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고대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시켜 달라고 사실상 ‘지시’한 것을 바라보는 역사고고학계의 반응은 이렇게 요약된다. 철의 왕국이자 고대 일본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가야사 연구의 심화·확대엔 공감하지만, 그 방식과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이나 박근혜 정부가 정치적 시책으로 내세운 신라사 등의 권역별 역사 ‘밀어주기’와 별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지긋지긋하던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회오리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권력자가 역사 연구 방침을 시달하는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했다”고 털어놨다.

애초 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의 명분으로 밝힌 것은 두 가지다. 가야사는 여섯 가야 연맹체의 텃밭이던 경남·북뿐만 아니라 섬진강, 광양만, 남원 일대, 금강 상류까지도 분포하는 넓은 역사이므로 영호남 지역화합을 위한 공동사업으로 할 수 있다는 점과 삼국사 중심, 특히 신라사에 묻혔던 허물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야사 전문가가 태부족한 상황이고, 문헌사료도 별로 없는 실정에서 명분 자체에 토를 다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학계는 현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온 소통이 역사 분야에서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에 묻혔다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국정 최고 권력자가 학자들과 가야사 실상을 대화하지 않고, 연구의 나아갈 방향을 지목해 정책으로 삼으라고 주문하는 것 자체가 본말이 전도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면밀한 세부 구상을 전제하지 않고 시혜를 주듯이 권력자가 국정과제화를 이야기한 터라 연구 주역인 학계는 젖혀놓고 정부기관과 지자체가 관광개발, 복원 등으로 예산 따내기 경쟁을 벌일 것이 불 보듯 한다. 지금도 계속 말썽을 빚는 경주 월성·황룡사의 속도전 발굴처럼 ‘졸속 복원’ 논란을 빚을 공산이 크다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경북 고령 지산동 산등성이에 능선을 따라 조성된 4~6세기 대가야 고분군들. 가야시대를 대표하는 고분 유적 가운데 하나로, 1970~80년대 순장 흔적을 포함한 대규모 무덤방의 자취와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관심을 모았다.

오늘날 가야사 연구에서 절실한 과제는 가야 문명의 온전한 재조명과 복권을 위한 연구 기반과, 식민사관 논란에서 벗어날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이다. 한반도 고대사에 가야가 남긴 흔적은 결코 작지 않다.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되지 못했지만, 철과 토기의 산지라는 이점을 살려 일본, 삼국, 중국을 오가는 중계무역 거점으로 수백년 번영했다. 3~6세기 일본 고대 야마토 정권의 토대가 된 철제 무기와 말갖춤, 스에키라고 불렸던 단단한 토기류들은 가야 문명과의 교류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인 학자들은 가야를 ‘가라’라고 적은 문헌사료인 '일본서기'의 과장·윤색된 기록을 마구잡이로 적용해 가야를 임나일본부의 핵심권역으로 단정했다. 그래서 김해, 함안 등 가야 유적지에 기념물을 세워놓는가 하면, 지금도 자기네 교과서나 역사서에 양국 학계에서 사실상 근거를 잃은 임나를 한반도 서남부를 지배했던 친일세력권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내 고고학계는 식민사학의 더께를 비집고 가야사를 바로잡는 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1980~90년대 가야권 유적과 유물의 활발한 발굴을 통해 낙동강 서부의 토기는 가야 것, 동부는 신라 것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된 지역 구분을 바로잡았다. 막대한 분량의 마구와 금속유물, 토기들을 발굴, 분석해 임나일본부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일본 학계가 인정하게끔 만들었다.

청와대와 정부는 학계의 숨은 노력을 존중하면서 이런 성과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공유하는 작업에 힘을 보태주는 것이 우선이다. 학계는 여전히 대중의 뿌리 깊은 ‘식민사관 트라우마’ 탓에 가야 관련 사적들이 다수 기록된 유일한 문헌인 '일본서기'의 사료 비판 작업도 눈치를 보며 해야 하는 형편이다. 지자체의 세계유산 사업이나 관광개발 등에 들어갈 ‘눈먼 돈’을 최대한 억제하고, 학계와 우선 소통하면서 가야사 앞에 놓인 학문적 걸림돌부터 차근차근 치우는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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