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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후 쾌락을 되찾는 여정을 기록한 누드 셀프포트레이트

  • 김태성
  • 입력 2017.06.05 15:57
  • 수정 2024.04.01 09:42

주의: 이 기사엔 일터에서 보기 부적절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화장실 바닥에 누워있었던 게 기억난다. 나는 4, 5, 6세 정도였다. 언제나 화장실이었다.” 브루클린 아티스트 로완 르네가 2015년에 쓴 글이다.

젠더 넌 바이너리(자신을 전적으로 여성 혹은 남성 젠더라고 정의하지 않는 사람. 여성과 남성의 스펙트럼 사이 어디쯤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인 르네는 아버지에게 학대와 추행을 당했다. 르네의 어머니와 할머니도 성폭력 피해자였다. “이 이야기는 끝도 없이 반복되는 게 지겹지도 않을까? 순종적인 딸과 아내들. 목소리를 내면 사람들이 나를 피할 것이다, 잔인하게 다룰 것이다, 죽을 것이다라고 배운 여성들. 자신의 신체를 유린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자신의 몸을 싫어하도록 배운 여성들 … 학대당한 다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찾으러 나선 여성들, 나처럼.”

르네의 아버지는 13세 소년에 대한 음란한 구타로 기소되어 15년형을 받아 복역 중 사망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 5년 뒤, 르네는 카메라를 사용하여 수년간의 근친상간과 학대가 남긴 육체적, 심리적 흔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무의 몸들 Bodies of Wood’ 시리즈에서 르네는 권력과 굴복, 긴장과 해방의 여러 자세를 취한 누드를 담았다. 르네가 싱크 옆 부엌 카운터에 알몸으로 앉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끝을 잡은 사진이 있다. 주위의 허물어져 가는 가정 공간은 여성의 신체가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탐구했던 프란체스카 우드만의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르네가 나무 조각들 사이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사진도 있다. 얼굴은 가려져 있다. 만물의 생사와 관련된 우주의 태곳적 요소들 속에 들어가기 위해 자연 속에 있는 자신의 몸을 기록했던 쿠바의 아나 멘디에타가 떠오른다.

르네의 프로젝트에서는 멘디에타의 영혼이 느껴진다. 사랑했던 남성에 의해 폭력을 당했던 여성인 멘디에타는 남편 카를 안드레와 함께 살던 아파트 창문에서 떨어져 33세에 죽음을 맞았다. 멘디에타가 죽기 직전 안드레와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후에 안드레의 얼굴에는 긁힌 상처가 있었다. 안드레는 기소당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아나 멘디에타처럼 창밖으로 던져진 여성들.” 르네의 글이다.

카를 안드레의 말에서 제목을 딴 이번 시리즈에서 르네는 고통의 현장이었던 자신의 신체에 쾌락의 경험 가능성을 가득 채우며 되찾는다. 르네는 누드 사진의 대상은 반드시 취약하거나 무력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르네가 찍은 몸에는 능력, 분노, 용서, 욕구가 뒤엉켜있다.

아래는 허프포스트의 르네 인터뷰 전문이다.

이 시리즈는 가족 내에서의 잔혹한 폭력을 다룬다. 이러한 이슈들을 추상적 시각 언어로 다루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왜 보다 직접적인 표현을 피했는가?

내가 자주 자문하는 것 중 하나는 폭력을 표현하면서 폭력을 영속화시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근친상간은 특이한 종류의 잔혹한 폭력이지만, 잔혹한 순간을 보여주는 게 가장 효과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잔혹함을 묘사하면 늘 페티시화 될 위험이 따른다. 그렇지 않다 해도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켜,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 때문에 가족 전체에 스며드는 미묘함과 깊은 모순을 덮어버리게 된다.

잔혹함은 선정적으로 묘사되는 순간이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나로선 미묘하고 불안한, 깊은 심리적 반응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했다. 트라우마를 준 상황이 지나고 한참 뒤에도 트라우마가 깊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내 이미지들이 추상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메인스트림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잘 끌지는 못하는, 트라우마의 더 오래가는, 더 조용한 면을 담고 있다.

당신의 몸을 이미지에 담기로 한 이유는? 기억과 신체의 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증언의 역사적 역할에서, 잔혹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내 신체는 이 프로젝트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아무도 내 경험을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기억이 육체적 반응으로 먼저 떠오른다는 말을 자주 한다. 트라우마를 경험할 때면 사람은 분열적 상태가 된다. 트라우마가 만성적이라면 분열은 일상의 생존 메카니즘이 된다. 뇌의 신경 연결 자체가 이로 인해 바뀔 수 있다.

기억과 신체의 관계는 복잡하다는 이야기다. 신체는 마음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들을 전달할 수도 있다. 마음은 장기적 학대에 대한 반응으로 생리적으로 변화하여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될 수 있다. 글이나 이미지로 기억을 표면화하는 과정은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목격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거리를 두는 것이 스스로의 경험에 대한 공감을 만들어가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나무의 몸들’이라는 말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무의 몸들’은 칼 안드레가 조각에 대해 했던 말이다. “나무는 모든 물질의 어머니다. 남성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유린당한 모든 여성들처럼, 나무는 줌으로써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새롭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준다.” 안드레는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아내였던 아티스트 아나 멘디에타를 살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나무의 몸들’에 딸린 진(zine)/개인적 에세이에서 안드레와 멘디에타를 언급했다. 그리고 나는 안드레의 말을 남성들이 폭력을 미학적 표현으로 정당화하는 공허한 판타지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 진을 통해 나는 이미지들에 대한 내 어린 시절의 내러티브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편집자 주: 진은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어디서 촬영했나? 왜 이곳들에 끌렸나?

VAR 프로그램으로 캘리포니아 주 소살리토의 선상 가옥에서 5주 동안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지내며 찍은 사진들이다. 앨런 와츠와 아그네서 바르다가 소유했던 배였고, 원래 모습이 상당 부분 유지되어 있었다. 너무나 묘하고 여러 생각을 떠올리는 곳이라 나는 배에서 작업을 많이 했다. 내게 깊은 인상을 주는 특정 장소, 특정 건축물들과 교감했다. 자전거를 타고 마린 해안 보호 구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산책로 가까운 곳에서 혼자서 옷을 벗어야 했기 때문에 야외 촬영이 훨씬 더 위험했다.

산책하고 돌아오다 주차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비가 왔고, 구름을 뚫고 비치는 해가 아름다웠다. 나는 고민 끝에 속옷을 입고 찍기로 했다. 이 논리에는 분명 판타지가 있었다. 어색한 마주침이나 육체적 위협이 있을 경우 속옷이 나를 별로 보호해주지 못할 거라는 건 분명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진 속의 감정을 담아내려면 내 몸이 실제로 위험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의 사진들이 ‘카메라를 위한 단독 퍼포먼스’라고 말한다. 이것이 당신에겐 어떤 의미이며, 앉아서 포트레이트를 촬영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나는 카메라와 내 무의식의 대화라고 설명한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만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특정 순간, 장소, 마음 상태를 전달하는 것을 생각한다. ‘’마음챙김’의 언어로, 나는 진정한 존재의 순간을 잡아내려 한다.

이 사진들은 젠더 기반 폭력과 피해와 관련된 긴장을 탐구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적, 순종적인 역할인 누드 피사체가 되는 것이 당신에겐 어떻게 느껴지는가? 대상화되는 기분, 힘을 얻는 기분, 치유되는 기분인가? 주체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나?

이런 이미지에서 누드 여성과 작업하는 것은 교묘한 속임수다. 근친상간의 맥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을 보며 떠올리는 욕구와 상충한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대되는 진실을 마주하는 불편함을 겪게 된다. 여기 보이는 신체가 유린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몸에는 호감이 간다. 나는 그것이 트라우마의 결과를 더 정확하게 말해준다고 본다.

피해자라는 것은 개인의 행동 능력을 빼앗아가고, 부정적인 경험을 병적으로 만든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수치라는 부당한 짐을 얹고, 피해자가 그 경험으로 ‘망가질’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 이미지 속 내 몸이 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맞서고, 나의 회복력과 힘을 인정하지 않는 터부를 넘어서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피해자’라는 위치에서 주장할 수 있는 힘이다.

애퍼처는 성명에서 이 이미지들이 폭력과 트라우마 이후 쾌감을 재발견하는 여정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육체적 쾌감을 다르게 느끼게 되었는가?

‘나무의 몸들’을 작업하며 나는 예술적 영감을 경험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경험을 했고, 근본적 생명력을 느꼈다. 나는 이 작업을 하며 깊은 기쁨을 느꼈다. 자유의 느낌과 연결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또한 내 작업 기술과도 관련이 있었다. 나는 이미지를 술술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고, 힘과 자신감을 가지고 내 기술을 쓸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쾌락의 원천은 창조적 기원의 경험이었다. 나의 그런 부분과 연결되자 내 인생의 모든 면에 원천이 생겼다.

창조적 표현은 세라피 및 치유와 관련이 있다고들 한다. 이 작업 과정은 당신에게 치유가 되었는가? 아니라면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었는가?

이 작업에는 여러 치유적인 면이 있었지만, 사회적 변화에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침묵을 깼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터부는 근친상간 행위가 아니다. 근친상간은 흔하고,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터부는 근친상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친상간을 공개적으로 논할 수 없는 이상, 이런 형태의 폭력은 앞으로도 행동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시리즈에 대한 반응 중 당신이 인상적으로 느꼈던 것이 있다면?

애퍼처에서 우리는 주말 동안 Voices and Faces Project와 손을 잡고 젠더 기반 폭력 및 기타 인권 유린 생존자들의 추천서 작성 워크샵을 열었다. ‘나무의 몸들’을 보고 한 이미지에 대해 한 편의 글을 쓰는 훈련 과정이 있었다.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창조의 기원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해석의 통제권을 포기하는 연습이기도 했다. 워크샵에 참가한 작가들이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동시에 내 의도와 너무나 가까운 해석을 해서 놀랐다. 마치 이 사진들이 집단적 무의식에 연결되어, 사람들의 반응에 반영된 것 같았다.

아래 슬라이드는 옆으로 밀면 된다.

 

*허프포스트US의 글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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