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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 인터뷰] 씨킴은 그저 예술가가 되고 싶은 부자인가?

  • 박세회
  • 입력 2017.05.29 13:49
  • 수정 2017.05.29 14:16

씨킴에 대해 지금 다시 생각한다는 건 어쩌면 조금 철 지난 얘기일 수도 있다. 씨킴이 미술계에 큰바람을 일으킨 건 10년도 더 된 일이다. 이미 그때 한국의 미디어는 각자 씨킴의 정체성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는 ‘예술을 하고 싶어 하는 부자’로 누군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을 가진 세계적인 수집가’로 시선과 호오의 방향을 나눴다.

그러나 방향과는 별개로 그는 항상 주목을 받았다. 아라리오 산업의 회장 김창일이 ‘씨킴’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건 조선일보에 따르면 1999년. 2년에 한 번꼴로 개인전을 열어왔다. 그때마다 수많은 매체가 꾸준히 그의 개인전을 보도했다.

유수의 잡지들과 인터뷰를 진행했고, 개인전이 열리면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럼에도 씨킴이란 두 글자가 머릿속을 때리는 이미지는 희미하다.

작가가 주목을 받은 이유가 작품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디선가 왜곡이 생긴 건 분명한데, 어디서 어떻게 왜곡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지적한 이가 많지 않다.

그가 그냥 아티스트는 아니기 때문일까?

씨킴은 2002년 천안에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을 개관한 걸 필두로 2006년엔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현재 삼청동)을, 2014년엔 제주도에 4개 관의 아라리오 뮤지엄과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사옥을 개조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열었다. 정리하자면 씨킴은 국내에 2개의 갤러리와 5개 관의 뮤지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냥 갤러리 주인인 건 아니다.

한겨레21에 따르면 씨킴은 지난 2005년 국제적인 스타작가를 만들겠다며 화단의 젊은 유망주들과 ‘전속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당시 보도로는 1인당 연간 5,000만원 이상을 대고 작품 제작 및 전시 지원을 전담하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초창기 아라리오의 지원을 받았던 작가가 구동희(31·비디오 퍼포먼스, 설치), 권오상(31·사진), 백현진(33·종합예술) 등이다.

근데 또 씨킴이 작가들의 패트론(patron·후원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조선비즈에 따르면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영국 미술전문지 ‘아트리뷰’ 선정 세계 1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올렸고, 미국의 유력 미술잡지인 아트뉴스의 200대 컬렉터(The ARTnews 200 top collectors)에도 여러 차례 오르내린 수집가다.

그렇다고 또 그가 모은 작품을 수장고에 쌓아 두기만 하는 사람인 것도 아니다.

그의 회사 ‘아라리오 산업’이 소유한 충남 천안의 '아라리오 스몰시티'에 가보면, 데미언 허스트의 ‘찬가’, ‘채러티’, 키스 해링의 ‘줄리아’ 등의 작품이 별다른 관람객 저지선도 없이 놓여 있다. 막상 가보면 주변과 대조를 이뤄 초현실적이다.

그가 그냥 공공미술 복지사인 건 아니다. 이 모든 건 연 매출 4,000억 원이 넘는다는 그의 회사와 공생하는 예술 사업이다.

복잡하고 궁금한 인물 씨킴의 아홉 번째 전시 '논(논<木+言+木> - 논다놀아'가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그를 만나러 가봤다.

(좌)쇳가루를 사용해 표현한 마릴린 먼로와 아인슈타인.(우) 바닥에 건축용 비닐과 벽돌을 쌓는 합판, 철판 등을 겹쳐 깔고 햇볕에 말리고 비에 적시기를 반복해 만든 작품.

이번 전시의 콘셉트에 관해서 설명을 좀 해달라.

1978년도부터 사업을 시작하면서 레스토랑이라든지 건물을 짓고 인테리어 하는 것에 많이 관여했다. 그동안 제 작업 중에 그런 건축 재료, 합판이라든지 알루미늄이라든지, 시멘트라든지, 쇳가루라든지(를 다루면서) 내가 느꼈던 것들이 나도 모르게 (작업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이번 전시엔 그런 재료를 가지고 한 작업과 80년대부터 했던 사진 작업들 비가 올 때 여름에 찍은 사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작품을 보면 작가 본인이 좋아하는 수보드 굽타나 트레이시 에민 등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아무래도 작업을 하면서 영향을 받을 거다. 학교 다닐 때 보고 느낀 게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 영향이 작업에 아이디어나 생각하는데 풀어 주는 열쇠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수보드 굽타 같은 경우도 물성에서 생명을 만드는 굽타의 정신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백화점이나 갤러리 등에서 엄청나게 많은 전시를 봤다. 그런 전시를 보는 건 특히나 '마무리'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보나?

새로 진출하는 젊은 작가들 낯선 나라, 문화가 다른 나라의 작가를 주로 본다. 낯선 곳에서 예술을 하는 건 그 나라의 아이덴티티가 표현되는 거로 생각한다. 아프리카 문화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와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문화들이 무척 매력적이다.

네온 조명을 활용한 씨킴의 작품. 그의 작품 대부분은 제목이 없다.

요새는 어느 나라의 작가들을 살피나?

중국은 넓은 나라라 곳곳을 살피고 있다. 상하이에서 중국의 젊은 작가들을 보고 있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작가들도 예전에는 살폈다. 최근에는 제주에 있는 세필 작가 문창배를 눈여겨봤다. 작품을 보고 좋아서 같이 하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다니는 일엔) 정말 끊임이 없다. 작품을 찾고 보는 행위 자체가 내 작품의 일부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컬렉터로 꼽히기도 한다. 최근에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늘고 있는데 좋은 작가를 발견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

잘 모르겠는데, 좋은 작가를 찾기보다는 이제는 좋은 작품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작가라고 해도 이상한 작품은 가격이 올라가지 않는다. 사도 이익을 낼 수가 없다. 난 작업실에 갔을 때 작품이 좋으면 산다. (소문을) 귀로 듣고 사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난 그렇게 따라가지 않는다. 선이나 색채에서 화음이 들리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코헤이 나와를 초기에 성공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들었다. 그때의 끌림은 어땠나?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다. 가장 좋아하는 건 크리스털로 된 ‘디어 시리즈’인데 보고 감동을 받았다.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주 :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소장한 ‘픽셀 디어’)에 하나 있고, 제주도 탑동에 ‘디어 패밀리’가 있다. 그런데 수집은 오늘의 주제와 맞지 않는 게 아닌가?

작가로서 사업가로서 수집가로서의 씨킴을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힘들지 않나?

수집엔 나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나는 미술관을 세우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으로만 수집하지 않는다. 어떨 때는 내 취향을 극복하고 미술관에 어울리는 작품을 컬렉팅 한다. 방금 한 얘기처럼 나는 천안 터미널에 있는 매점 4곳을 사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 매점의 설계를 직접 다 알루미늄으로 바꿨다. 그걸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는 식당을 25개 정도 했는데, 그때도 인테리어에 다 관여했다. 작업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작품을 통해 생명과 영혼을 전달하려고 하지만 그게 다 연관이 된다고 본다.

과거 인터뷰를 찾아보니 씨킴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이 크게 갈린다.

나는 내가 계속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상업적으로 뭘 얻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난 내 머릿속에서 미술품을 통해서 영향을 받아 지금의 나로 달라진 거다. 나는 (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데 그런 건 개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인도처럼 예술품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다. 60~70년대에는 먹고 살기가 다급했고, 당시엔 미술에 재능있는 사람들이 (미술) 학습을 통해서 화가가 됐다. 그런데 이제는 전문 분야에서 예술가가 나와야 하는 게 정상이다. 자기 분야에서 실험하다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발견해 작가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인문과 철학을 바탕으로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시멘트를 사용한 이 페인팅은 성인 장정 4명이 들어 옮겼다고 한다.

본인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나는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사업을 하면서도 인테리어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장미 같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제주도에 있는 우리 갤러리 등을 만들 때 내가 중점적으로 여긴 건 생명과 영혼이다. 그런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의 평가에는) 덤덤하다. 나는 맨손으로 시작했는데, 내 사업에 아트가 들어오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난 모든 경쟁을 이겼다. 난 사업을 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만들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내 세계가 어디까지 갈지 완성해 보고 싶다. 방관자로 있지 않고 전달자로 직접 그 속에 들어가서 완성하고 싶다.

수집가로서 원하는 작품을 손에 넣었을 때, 발굴한 작가가 성공했을 때, 원하는 작품을 완성했을 때 중 언제 희열이 가장 큰가?

(희열이 아니라) 고통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힘들다고 하는 얘기를 들어봤는가?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사람이야 힘들겠지만, 목적이 있는 사람은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건강도 되찾을 수 있고 정상에 올라가려는 목적이 뚜렷하면 그 과정을 즐긴다.

오늘 서울에서 천안으로 프레스를 초청한 거로 알고 있다. 반응은 어땠나?

오늘 아침에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2년마다 전시를 하면서 전시장에 놓여있는 내 작품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운다. 머릿속에 상상했던 작업실에 있던 작품과 이 큰 공간에 있는 작품은 느낌이 다르다. 여러 번의 전시를 통해서 나름의 입체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게 됐다. 전시를 해야 하는 이유다. 근데 막상 하면 부끄럽다. 오늘도 기자들이 가면서 '(작품) 좋아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난 내가 가지고 있는 DNA가 작가가 가지고 있는 DNA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얘기하듯이 폼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 고통은 누구도 모른다.

사실 씨킴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천안이라는 지역사회와 그 안에서 공공 미술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생각하면 씨킴이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죽고 나면 평가해줄 것이다. 원래 나는 인터뷰하는 걸 싫어한다. 오히려 나에 대한 논란이 생기면 참 좋다. 제주도에 미술관을 세우고 나서는 내 진정성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난 미술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유학도 다녀온 적이 없다. 그러나 내게는 '인스팅트'가 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서, 실험을 통해서, 내 작업을 통해서 더 깊숙이 깨달은 게 많다.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인지 직접 해보면서 깨달은 거다. 그런 게 중요한 거다. 나같이 실제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없다. 부모님이 준 돈으로 쓴 것도 아니고 내가 다 번 돈이고 내 생각과 내 머릿속에 있는 우주에 있는 걸 꺼내서 결정하고 판단하다. 그걸 논리적으로 얘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누구하고 타협해 본 적도 없다.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작가 시스템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내 사업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를 대비한 거다. 예전에 아라리오를 2만 평 규모로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반대했지만 난 밀어붙였다. 그게 내 DNA다.

미술관은 언제쯤 하려는 계획인 건가?

상황을 봐야 한다. 미술관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난 문제가 생겨도 남한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단 미술관을 하기 위해서는 갤러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전 공간 사옥에 있는 아라리오(‘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도 그렇고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도 그렇고 그 모든 공간을 내가 다 디자인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정글에 가서 정글의 법칙대로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내가 잘났다는 건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기분 좋았던 게 있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다 내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그 모든 일이 다 연결이 되어서 나왔다. 지금까지 했던 '레이닝'(제주에서 여름에 찍은 사진 연작)부터 냉장고 소재, 시멘트까지 모든 게 연결됐다. 그런 많은 실험을 통해서 이런 작업이 나왔다.

사업가, 갤러리 오너, 세계적인 수집가, 뮤지엄 관장 그리고 작가로서의 역할을 갖다 보니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중 어떤 면에선 노력한 것보다 더 크게 득을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건 학습에 의한 미술을 배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술 학교 가면 교수가 많은 전시를 보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나는 컬렉터로서 얼마나 많은 미술품을 봤나? 학교 안 가도 그 사람보다 더 많이 봤다. 나는 지금도 찾아간다. 아까 말한 문창배라는 사람도 내가 직접 찾아갔다. 예술이라는 것은 경험이 중요한 거지 학습을 통해서만 얘기해야 하나? 근데 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난 사업도 누구같이 돈이 많아 다른 사람 시켜서 한 게 아니다. 식당도 다 내가 가서 직접 보고 짜서 했다. 학습은 모르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거다. 식당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이 편하게 와서 밥을 먹을 수 있게 직접 다 현장에서 내가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인스톨레이션, 설치다. 설계도면도 그리고 예전에 외국 나가서 식당을 하려고 하면 사진을 못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면, 잘못하면 도용한다고 끌려갔다. (그래서) 거기 가서 나는 직접 다 그렸다. 그때는 그게 미술인지 몰랐는데 그런 게 쌓이고 쌓여서 폭발한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은퇴한 사람이 그림 열심히 그려서 인사동에 갤러리 빌려서 전시회를 하는 그런 (대관 작가) 수준은 아니다. 일주일에 백만원이나 2백만원 내고 본인 전시회를 하는 그런 차원은 아니다. 난 그렇게 미술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생명과 영혼을 전달해 주고 싶은 거다.

본인은 대관 작가와는 다르다는 얘긴가?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방금 한 말은 미술계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인가?

그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내가 특정 조직에 관해 얘기한 건 아니다. 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비판적인 사람은 대놓고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와서 나한테 내 작품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사려는 사람도 많은데 내가 안 팔 뿐이다. 난 좀 숨어있고 싶다. 중국이나 어디 미술관에서도 전시하자고 하는데 난 싫다. 난 돈을 내고 하는 전시는 싫다. 중국은 작가나 스폰서가 돈을 내야 하는 시스템이다. 해외에서도 여러 번 초청 받았다. 영국 유니언 프로젝트에서도 개인전을 했었고, 캘리포니아에서 하는 그룹전(‘Bug-Eyed: Art, Culture and Insects’, 미국 캘리포니아 Redding 2004)에도 참여했고, 라이프치히에서 하는 뮤지엄(주 : 독일 라이프치히 라이프치히조형미술관)에서도 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십수 년 전에 1만5천 달러를 주고 샀다. 그렇지만 내겐 의미가 없다. 아직 난 실험을 더 해야 한다. 내가 더 좋은 향기를 갖게 되면 벌이 와서 꿀을 만들어 줄 것이다. 내가 2년마다 아라리오 천안에서 전시회를 하는 이유는 이 공간이 좋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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