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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 엄마' 아닌 한숙강을 만나다

"집안일이라는 게 그렇다. 눈 뜨면 시작해서 눈 감을 때까지 계속이니까. 식구도 많았고, 자다가도 식구들한테 무슨 일 생기면 해야 하고. 그래서 가끔씩 남편이 출장을 가거나 애들이 수련회 가서 집에 없으면 시부모님이 다른 방에 계시긴 해도 너무 좋았다. 혼자 자야 하는데, 내 방에 나 혼자 갖는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너무 신이 나는 거다. 피곤하니까 자야 하는데 묘하게 흥분이 되어서 잠도 안 오고 뭔갈 해야 할 것 같고. 뭔가 나만의 어떤 걸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날은 믹스 커피 말고 원두커피 마셔야 할 것 같고, 책을 읽어야 할 것 같고."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에 답하기 위해 글을 쓰고 엄마를 만납니다. 모성과 희생, 사랑이라는 흔한 보통 엄마의 조건을 벗어나 '진짜' 엄마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엄마라는 단어로 뭉뚱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조금씩 다르고, 독특하며, 때로는 불편할지라도 엄마란 이름 뒤에 가려진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보통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이 시대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지윤 엄마'란 이름 때문에 잊고 살았던 한숙강을 만나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한숙강(56) 씨는 최근 건강 문제로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워킹맘이었다. 중매를 통해 만나 결혼한 남편과는 5년 전에 사별했고, 두 명의 딸이 있다. 지금은 전업 주부로 지내고 있다.

한숙강 씨를 만나기 며칠 전, 그의 둘째 딸인 김지윤(26) 씨를 먼저 만났다. 김지윤 씨가 평생에 걸쳐 기억하는 한숙강 씨는, 아플 때가 아니면 일을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몸이 약하고 마른, 다소 예민한 사람이자 같은 연배의 사람들처럼 노후 준비나 재테크에는 영 관심이 없는 소녀 같은 사람이라고도 전했다.

그다지 외향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들도 만나고 동창들과 여행도 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했다. 약하고 예민한 사람이 큰 일에는 꽤 대범하다는 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서 기인한 것 같아 때로는 안쓰럽다고, 몸이 안 좋으면서도 자꾸 일하려는 모습에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김지윤 씨는 한숙강 씨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살가우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냉정한 모습이 싫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놀란다고 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재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을 소개하신다면.

이름은 한숙강. 이름이 좀 어려워서 한강이란 글자 가운데다 숙 자를 넣으면 된다고 설명한다. 다들 잘 못 알아 듣더라.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쉰여섯이 됐다. 딸이 둘 있고, 남편과는 5년 전에 사별했다. 그 이후로 신장 쪽이 좀 안 좋아서 일을 쉬게 됐다. 그전까지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특별한 취미는 없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려고 하고, 거기서 인간관계를 만들고 있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해서다. 최근 들어 나이가 들면서 어릴 때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4월에도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거의 30년 만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30년만이시라.

애들이 다 컸으니 누굴 돌보지 않아도 되니까. 예전에는 다들 가정이 전부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관심사가 가족에서 친구한테로 옮겨가는 거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시는 편인가.

전혀. 이야기하는 걸 즐기는 편도 아니다. 그런데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건 괜찮다. 그래서 일대 일로 만나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만나는 게 편하다. 리액션만 하면 되니까.

친구 분들 만나시면 주로 어떤 이야기하시나.

옛날 얘기를 많이 한다. 지금 사는 얘기보다도. 요즘 얘기야 메신저(카카오톡)로 좀 알고, 결혼식 같은 행사에서 보니까 (최근 소식은 좀 안다). 사실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공통점은 별로 없다. 학생 때랑 지금은 정말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한 친구가 "너희 다들 왜 이렇게 억세 졌냐"라고 묻더라. 신기했다. 그 친구들 중에서도 나만 이사를 많이 다닌 편이라 '그땐 이랬고 이땐 이랬지' 하는 게 더 없는 편이다. 다들 한 지역에서 어릴 때부터 자란 애들이라 아마 나보다도 서로들 새로운 면을 많이 보는 것 같다.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고.

아버지가 교사여서 전근을 많이 다니셨다. 아버지는 인천 사람, 어머니는 목포 사람. 학교를 그쪽에 계셔서 나도 고등학교는 여수에서 나왔다. 내가 학교를 좀 일찍 갔다. 옛날엔 그런 게 가능했는데,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1학년 담임이니까 여섯 살짜리였던 나를 그냥 앞에 앉혀뒀다. 그게 그냥 입학이 된 거다. 그래서 1학년 학적부가 없다. 고등학교를 79년도에 졸업해서 서울로 왔다. 가족들도 80년도에는 다 올라와서, 친정도 이 근처(관악구)다. 그 이후로는 결혼도 여기서 하고 쭉 여기서(살았다).

남편 분과는 어떻게 만나셨나.

중매로 만났다. 친정이 다니던 교회 집사님 소개로.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해에 대학을 못 가고 늦게 가서 대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시아버지는 내가 늦게라도 대학을 간 것에 대해 좋게 보셨다고 하더라. 생긴 것과 다르게 의지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아 좋았다고.

남편 분에 대한 기억이 궁금하다.

남편이랑은 중매로 만났으니까 대단한 연애 감정 그런 건 별로 없었다. 예전에 서울대 사거리에 '난다랑'이라는 다방이 있었다. 거기서 만났었다. 한 시간 정도 얘기했는데 약속이 있다고 간다는 거다. 이 사람 뭔가 싶었다 (웃음). 미리 약속해놓은 거라 나온 거라고, 바빠서 지금 가야 한다더라.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관악구청 밑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는데, 남편이 나중에 말하더라. 사실 다방에서 만났을 때까지는 그냥 그랬는데, 버스 탄다고 가다가 돌아보면서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뻤다고.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나중에 진짜 선약이 있었다고 사과를 했다.

시간이 없어서 결혼 전까지 별로 만나지도 못 했다. 여기 24시 운영하는 곰탕집이 있는데 거기가 예전에 '은행나무집'이라는 식당이었다. 거기서 약혼식하고, 세 번인가 만나고 바로 결혼했다. 우리는 차로 동해안을 쭉 도는 신혼여행을 했다. 재밌었던 게, 내가 팔짱을 끼니까 남편이 뻣뻣하게 굴었다. 나중에 1년 지나고 나서 얘기하더라. 너무 어색하고 빼라고 하기도 그렇고 더 끼라고 할 수도 없어서 힘들었다고. 뭐 그렇게 재미있게 연애하지도 못 했다. 결혼하고도 어른들이랑 살았으니까. 근데 내 말투가 좀 애교 있다고는 하더라. 그래서 좋아졌다고 (남편이) 그랬다.

나는 연애할 때는 남이지만 결혼하면 내 남편이고 내 식구니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애들한테도 항상 아빠 출근할 때 줄 서서 뽀뽀해주고 그랬다. 그 광경을 시어머니가 딱 봐서 민망하기도 했었다. 두 사람 다 표현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긴 했지만 잘 산 것 같다.

▲ 딸 김지윤(26) 씨가 보내준 한숙강(56) 씨의 젊은 시절. 남편은 한 씨의 웃는 모습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결혼 이후 같은 집에 계속 사신 건가.

결혼하고 나서는 세 번 정도 이사했다. 그 전까진 시부모님을 한 20년 모시고 살다가 분가했다. 그때는 결혼해서 시댁에 들어간 거니까 시동생, 시누이도 같이 살았다. 우리 둘째(김지윤 씨) 낳을 때까지도 같이 살았다. 시부모님은 지금은 다 돌아가셨다.

그때도 일을 하셨나.

그렇다. 그때는 여섯 시엔 꼭 일어나서 밥 차리고 출근하는 사람들 출근시키는 걸로 일과를 시작했다. 애들 어린이집 가기 시작한 이후로 방문 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방과 후 교사도 좀 하고. 그러다 나이를 먹으니까 그걸 못해서 그 이후에 어린이집 일을 한 거다. 그때는 퇴근하는 식구들을 챙겨야 하니까 오래는 못하고 오후에 몇 시간 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요즘 사람들처럼 다들 밥 먹는 시간이 다르고 그러진 않았다. 웬만하면 어른들이랑 같이 먹으려고 하니까, 밥상을 여러 번 차리는 수고는 덜했다. 저녁 먹으면 각자 방으로 들어가니까, 그러다가 누가 찾아서 요구사항이 있으면 해결해주고 그랬고.

가르치시는 일에도 애정이 많으신 것 같다. 본인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편인가.

그렇다.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다. 성취감이 있달까. 교육자 집안이었으니 내력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아파서 쉬는 거지 교회에서도 할 수 있는 한 그런 일을 많이 하려고 했었다. 내가 마음을 담아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게 좋고, 가르치면 아이들이 반응을 하는 게 좋다. 내 성격이 그렇게 다정하거나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도 그렇더라. 다만 뭔갈 가르쳤을 때 오는 피드백에 희열을 느끼는 편이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을 하려고 한다.

집안에 있는 것보다 나와서 일 하는 게 좋으신가.

그렇다. 집안일만 하면 긴장감이 좀 없어서, 그게 싫다. 집에 있으면서 무기력해지니까 더 아픈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쉬면 좋아질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다. 요즘도 4시간짜리라도 일을 하고 싶다. 교회에서 장애 아동들 가르치는 봉사라도 하루 하면 그 시간이 그렇게 좋다. 집안일이야 어른들이랑 살 땐 어쩔 수 없이 한 것도 있고.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있다. 어른들 모시고 안 살았으면 내가 우리 애들 삼시세끼 따뜻한 밥이나 잘 해줬을까 싶다. 맨날 시켜먹었을 것 같기도 하고.

딸들의 교육에도 욕심을 내신 편인가.

오히려 우리 애들 교육엔 관여를 안 하게 됐다. 공부하라고도 잘 안 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체력적으로도 힘드니까 우리 애들한테는 신경을 많이 못 쓴 것도 있다. 애들이 크고 나니까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가끔 얘기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애들도 "엄마가 안 그러길 잘 했다"라고 대답하더라. 그래도 다시 키운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 하는 생각은 가끔 든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끌고 가는 것보다는 뭔가를 같이 하는 쪽이다. 예전에 근무하던 어린이집 뒤에는 산이 있었다. 비가 안 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거길 거의 매일 갔다. 눈 오면 눈 온다고 데리고 나가고 그랬다. 사실 그래서 체력적으로 나는 좀 힘들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면 그냥 좋았다. 그런데 엄마들은 사실 그런 것보다 노래 하나 제대로 배워오는 걸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내 교육관과는 좀 다르다.

지윤 씨가 방학 때 어린이집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고 얘기했다. 아주 어린아이들인데도 한 명 한 명을 인격으로 대하시는 게 느껴졌다고 하더라.

사실 내 딸들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애들이 자기주장이 좀 강하다. 다른 집이랑 비교해봐도 내 딸들이 참 착한 편인 것 같긴 한데, 착하면서도 다 자기 마음대로들 한다. (김지윤 씨는 한숙강 씨가 자신의 엄마가 아닌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격증을 뒤늦게 따서 시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이나 자신의 언니를 키울 때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들이 한 씨를 많이 따르는 바람에 해가 지나면 교사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대로 한 적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오늘은 지윤 씨의 어머니로서 뵙게 됐지만, 한 가정에서는 또한 따님이시다.

밑으로 동생 셋이 있는 첫째다. 바로 아래 남동생이 있다. 어려서부터 그 아이가 월등해서 비교 대상이 됐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뚝 떨어진 여동생 둘이 있다.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남동생이랑 둘이 시간을 많이 보냈다. 집 기둥에 고무줄 묶어놓고 같이 놀고. 그래도 항상 비교가 됐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커서 생각하니까 그렇더라. 중학교 2학년 때 쓴 일기를 우연히 봤는데 그런 얘기가 쓰여있더라. 엄마가 남동생을 좋아하고, 친할머니는 셋째 여동생을 좋아하고, 아빠는 막내를 좋아한다고.

친정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남동생은 정말 그런 아들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마한테 잘한다. 그래서 내가 올케한테 장난 삼아 늘 '힘들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섭섭한 게 좀 있었다. 엄마의 아들에 대한 무한 사랑 그런 것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내가 엄마한테 (남동생에 비해) 잘 못 하니까 기꺼이 감수하는 편이다. 친정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자녀가 왔다 가면 베란다에서 차가 출발할 때까지 쳐다보는 그런 엄마. 모르긴 몰라도 올케는 그런 부분도 힘들 거다.

▲ 앳된 모습의 한숙강 씨(가장 왼쪽)와 어린시절 두 딸의 모습. 훌쩍 큰 두 딸과 여행을 다니는 것이 한 씨의 행복이다.

친정에서는 어떤 딸이었나.

사실 나는 딸로서는 좀 철이 없었다. 딸이었을 때는 '엄마'라는 역할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 내 생각만 하고. 결혼 초기에는 친정에 가서 시댁에서 겪는 힘든 일 같은 걸 다 이야기하고 그랬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친정 엄마가 속상할 거라고 생각을 아예 못 한 거다.

몸이 약해서 임신이 좀 늦어졌는데, 그것 때문에 시댁에서 잔소리를 꽤 했다. 내가 밥을 잘 안 먹는 데다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으니까 밥 먹을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고기 냄새 맡으면 속이 안 좋았다. 그런데 꼭 시아버지가 내 밥그릇에 고기를 얹어주는 거다. 그러면 꼭 임신하라고 부담 주는 것 같아서 그렇게 싫고 힘들었다. 또 시어머니는 옆에서 '당신은 나한테는 고기반찬 올려주지도 않더니' 그렇게 거들고. 같이 살던 시누이가 "엄마 새 언니 부담 좀 그만 주라"고 말할 정도로 (불편하게 하셨다).

그때 참 힘들었다. 시부모님이 "네가 임신이 안 되는데 친정에선 뭐 하냐"는 식으로 말씀하신 적도 있다. 근데 내가 참 철이 없는 게, 그런 얘기를 친정에 가서 막 하고 그랬다. 그런 얘기가 친정 엄마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것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내가 그 정도로 철이 없었다. 지금도 내가 몸이 안 좋은데 자꾸 일하겠다고 하니까 친정에서도 말린다. 안 아픈 게 효도하는 거라고.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한 10년은 지나야 친정 엄마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고부갈등이 심하셨나 보다.

고부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나도 시어머니도 표현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시어머니가 이상한 고집을 많이 부리시더라. 화풀이 같기도 했다. "아버지 없다고 니들이 나를 무시하냐"면서 윽박을 지르시고 그랬다. 사실 시부모님도 별로 사이가 좋았던 분들이 아니었다. 두 분 다 이북 분들이신데, 시아버지가 성격이 워낙 강하셔서 시어머니가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시아버지 돌아가시면 시어머니가 좋아하실 줄 알았다 (웃음). 근데 아니더라. 그때 가운데 낀 남편이 좀 고생을 많이 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내가 일방적으로 손해보고 산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시어머니가 뭐라고 해도 대꾸도 잘 안 했다. 나는 거의 듣는 쪽이었고, 시어머니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같이 사는 동안 늘 불편했다. 나는 머리 속으론 불편한 구석이 많은데, 말을 못 했으니까. 그럴 때는 남편이 위로해줘서 견딘 것도 있다. 결혼 초기에는 친정이 가까운데도 못 가게 하는 게 참 서운했는데 나중에서야 '버릇 잡으려고 그랬다'는 시어머니 입장을 알게 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청 화가 나서 우리에게 쏘아붙이는 시어머니를 봤는데, '아 나만 손해보고 산 게 아니구나. 시어머니도 마음속엔 그런 게 있었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 같다. 같은 여자로 바라보니까 이해가 되면서 좀 편해지기도 했다.

뭐가 제일 힘드셨나.

어른들이 편하게 해줘도 불편할 텐데, 꼭 어른들은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하는 게 아니라 '쓰리 쿠션'이라고 하나, 엄한 걸 건드려서 더 불편하게 만든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닌데 그 말은 안 하고 다른 걸 걸고넘어지는 거다. 그러니 뭐가 문젠지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같이 살 때 불편했던 것 같다.

임신하셨던 당시 얘기가 좀 더 궁금하다. 사실 한 여자의 인생에서 임신이라는 게 그전까지 해본 적 없는 경험이다. 게다가 다른 상황들도 힘드셨다고 하니까.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사실 맨 처음 임신되고 산부인과에 갔는데 안 보인다는 거다. 좀 이상하다고. 그러다 주일 아침에 교회 가려고 나서려는데 생리통 심할 때보다 더 배가 아팠다. 그러다 식은땀이 쭉 나면서 하혈했다. 유산된 거다. 그다음에서야 첫째를 가졌다. 그랬더니 무슨 밀린 과제해낸 것 같은 해방감이 있었지.

그렇게 첫째를 가졌는데, 그때 내 몸무게가 37kg였다. 병원에서 이 몸으로 무슨 애를 낳느냐고 그랬다. 하루에 우유를 2리터씩 먹으라고 하더라. 우유도 잘 못 먹는데. 그래서 임신 초기에는 나한테 맞는 우유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다. 온갖 우유를 마셔봤는데 그나마 파스퇴르 우유가 제일 입에 맞아서 열심히 마시려고 노력했다.

임신하고 처음 일주일은 물 한 모금도 못 먹을 정도로 고생했다. 그래도 고통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한 일주일 고생하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간장게장이 먹고 싶더라. 그거 시장에서 사다가 먹고 나니까 입맛이 돌아왔다. 그 이후로는 잘 먹었다. 그때가 제일 건강했다. 임신했을 때 좋았던 기억이다.

지나고 나니까 아쉬운 것도 있다. 애들 다 낳고 나서 얘긴데, 드라마 보면 남편한테 "이것 먹고 싶어", "저것 먹고 싶어" 하면서 사다 달라고 하지 않나. 그거 한 번도 못 해본 건 좀 아쉽다. 그래서 자주 얘기했다. 남편은 "그래도 그때 밥 잘 먹었던 게 좋은 거"라고 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웃음). 여하튼 가장 건강했고, 애들도 건강하게 낳았다. 주변에서 다들 신기하다고 했다. 이렇게 약한 내가 자연분만을 했다고.

키우는 건 수월하던가.

오히려 임신했을 때보다 낳고 나서 힘들었다. 애들이 잠을 안 자서. 어른들 있는 방에 데려가면 안 자고, 우리 방에 데려가면 남편 출근해야 해서 자야 되는데 우니까 안 되고. 그래서 애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애 안고 계단에 앉아서 애를 보고 그랬다. 그때는 별로 서럽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아이니까. 아, 시어머니가 애들 아빠 자야 되는데 애들 자꾸 우니까 다른 방 가서 자라고 그러기도 했다. 그 소리도 친정에 가서 했었다. 참 철이 없었지. 그때 엄마가 화내고 서운해하는 거 처음 봤다. 사돈도 사돈인데, 사위한테 서운하다고. 애는 같이 낳아 놓고 어떻게 그러냐고.

내가 낳은 딸들이지만 이런 건 참 이해가 안 된다 싶으신 것도 있나.

사실 그런 건 별로 없다. 다만 내가 엄마니까 내 딸들이 이래 줬으면 좋겠다 싶은 건 있다. 내가 먼저 산 사람으로서 해본 시행착오 같은 걸 줄여주고 싶은 마음인 거다. 어른들 조언을 듣고 가면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굳이 어렵게 가는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가끔 좀 단순하게 살아 보라는 얘기는 한다.

다른 잔소리는 별로 안 하시는 편인가.

밥 잘 먹으라는 이야기 정도. 내가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잘 안 챙겨줬던 것 같기도 하다. 애들이 아토피가 있는데 그게 면역력 탓이라고 하더라. 내가 잘 안 해줘서 그런가 싶었다.

집안일과 일을 병행하시기도 했고, 시댁 어른들과의 관계도 편치 않으셨으니 분가하기 전에는 집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일도 적으셨겠다.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로망 같은 건 없으셨나.

집안일이라는 게 그렇다. 눈 뜨면 시작해서 눈 감을 때까지 계속이니까. 식구도 많았고, 자다가도 식구들한테 무슨 일 생기면 해야 하고. 그래서 가끔씩 남편이 출장을 가거나 애들이 수련회 가서 집에 없으면 시부모님이 다른 방에 계시긴 해도 너무 좋았다. 혼자 자야 하는데, 내 방에 나 혼자 갖는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너무 신이 나는 거다. 피곤하니까 자야 하는데 묘하게 흥분이 되어서 잠도 안 오고 뭔갈 해야 할 것 같고. 뭔가 나만의 어떤 걸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날은 믹스 커피 말고 원두커피 마셔야 할 것 같고, 책을 읽어야 할 것 같고.

지금은 혼자 계실 시간이 많잖나.

오히려 아니다. 그때는 그러고 싶었는데, 애들도 커서 집에 잘 없고, 식구들도 없어지고 그러니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이제는 떠나가는구나, 그런 걸 생각하니까 나만의 공간에 대한 환상 같은 것보다는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럼 혼자 계실 땐 주로 어떤 시간을 보내시나.

TV를 보거나, 성경을 읽거나,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몇 개 있다. 드라마보다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좋아한다. 역사 이야기 같은 것, 그런 게 좋더라. 드라마는 보기 시작하면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계속 봐야 하는데, 할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못 하는 게 싫어서. 사실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서, 여행 프로그램으로 대리만족을 많이 한다. 집안일은 잘 안 한다. 관심이 없어졌다.

▲ 딸 김지윤 씨가 보내준 한숙강 씨의 일상. 방 안에서 강아지를 돌보고 있다.

집 밖에서 보는 게 편하다고 하신 것도 그런 맥락인가.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다른 공간이라는?

(한숙강 씨와는 한 씨의 집 근처 교회 내부의 북카페에서 만났다. 김지윤 씨 또한 한 씨가 집보다 교회를 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김 씨가 이번 인터뷰에 한 씨와 함께 응한 이유도, 한 씨가 자신이 몰두할 공간이나 취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렇다. 교회나 산도 그렇다. 건강 생각해서 요즘은 관악산이나 낙성대 많이 간다. 그 시간이 참 좋다. 사람들은 위험하다는데 나는 혼자서 잘 간다. 별생각 없이 산책하다 보면 자연이 변하는 게 참 예쁘다. 봄 되니까 꽃이 피는 게 그렇게 예뻐 보인다.

어른들은 왜 그렇게 꽃을 좋아하시는 건가 (웃음).

얼마 전에 아는 아줌마들끼리 소풍을 가다가 현충원에 벚꽃이 만발한 데서 교복 입고 노는 고등학생들을 봤다. 친구들끼리 같이 사진 찍고, 서로서로 찍고 그러더라. 우리끼리 그런 얘길 했다. 저 나이 때는 "친구가 제일 중요하지", "제일 예쁠 때지" 하고. 우리 나이엔 그런 게 없으니까 꽃이 예뻐 보이는 게 아닌가 한다. 친구들 프로필 사진도 죄다 꽃이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다. "나는 자연 별로다", "도시가 좋다"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오히려 도시 생활만 해서 그런지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많이 한다.

사실 가장 여쭙고 싶은 부분은 그것이었다. 우리의 '엄마'들에게 가족이나, 경제적인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가지고 싶은 공간은 어딜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의 경우엔 오히려 집안에선 다른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별로 없다. 오히려 아예 벗어나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을 뿐이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도 종종 말했다. 남편은 "인터넷도 잘 되고 보안시설도 잘 돼 있어야지 안 그러면 너 절대 거기서 못 살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예전엔 시장 가고 그런 걸 더 좋아했는데, 지금은 좀 달라졌다. 시골에 살아보지도 않았고, 부모님도 시골에서 일해본 분들이 아니라서 경험해본 적이 없는데도 그런 걸 보면 정말 '막연한 로망'인 것 같기도 하다. 현실적으로는 노후에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혼자만의 공간에 좀 욕심이 덜한 것도 같다. 일본에는 그런 곳들도 많던데. 공용 공간은 공유하고, 각자 자기 방이 있고 그런 실버타운. 그런 고민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혹시 다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

그 생각은 안 한다. 사실 주변에서도 권유하긴 한다. 내가 신앙생활을 해서 그런지, 결혼을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잘 먹고 잘 살면 좋겠지만 지금 삶에 만족하고 있고. 여태 다른 삶을 살아온 모르는 사람과 맞춰야 하는 것도 어렵다. 불편할 것 같고. 만약 결혼을 한다면, 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자의 가정으로 편입되는 모양 새니까 그 남자의 가정에 내가 소속돼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다. 내 딸들의 소속도 고민이 되고.

이제 따님들도 사회적 통념에 따르면 결혼을 고민할 나이가 아닌가. 딸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결혼은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한편으로는 여자가 결혼하면 얽매이는 게 많고 책임이 많아지니까 힘들겠다 싶은데, 할 거라면 너무 늦지 않게 하는 게 (아이를 키울 걸 생각하면) 좋지 않나 싶다. 요즘 생각 드는 건 혼자 사는 게 그땐 참 좋은데, 아무리 사람이라는 게 다 혼자라고 하더라도 혼자일 때 외로움과 누가 있을 때의 외로움은 다른 것 같다. 누가 있으면 든든한 것도 있고, 혹시 자식을 갖게 되면 거기서 오는 기쁨도 있고.

그래도 그건 본인이 할 결정이니까. 그런데 큰 딸은 너무 관심이 없어서 좀 걱정이긴 하다. 만약에 혼자 산다면 어떻게 살 건가에 대한 걱정이다. 자기 직업이 뚜렷해서, 혼자 살만 한 여건이 갖춰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여자 혼자 살 때 오는 불편함 같은 게 있지 않나. 아무래도 부모 입장이니까 자식이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거겠지. 원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면.

딸 가진 엄마 입장이라서 더 그런 부분도 있으실까.

그렇다. 사실 그래서 애들한테 혹시나 결혼해서도 계속 일을 하면,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봐주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들 있는 엄마들 보면 자기들도 자기 딸들한테는 그렇게 하면서 며느리들한테는 '여자들이 너무 억세다', '일 계속하려고 한다'고 얘기하는 걸 종종 본다. 잣대가 다르더라. 나는 내 딸들이 결혼하더라도 일하기를 원한다. 그래도 같이는 살기 싫고, 일을 포기하지 않고 결혼생활을 하겠다면 가능한 한 도와주고 싶은 거다.

딸들이 이런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있다면.

딸 둘도 참 다르니까, 애들 성향에 따라서 좀 다르다. 큰애는 얘를 좀 품어줄 수 있는 사람. 같이 뭔갈 베풀고 살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좀 나이 많은 사람이 낫지 않을까 싶다. 둘째는 이 아이와 친구처럼 늘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사람.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 둘이 함께 원하는 걸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혼자서만 생각한다. 그래도 본인들이 선택할 문제니까. 나는 그냥 기도할 뿐이다.

한숙강 씨는 딸 지윤 씨의 졸업식이 끝나고 두 딸과 함께 갔던 고창 여행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옥에 묵었는데, 그 추운 2월에 문을 열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선 두 딸과 누워 새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우쿨렐레를 배우고 싶다고도 했다. 혼자는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지윤 씨에게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서울대 사거리에 있다고 하더니만 자기도 바빠서인지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면서.

한숙강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본 그의 모습은 딸이 말한 것과 겹치기도, 때로는 전혀 다르기도 했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일을 계속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는 딸의 말과 달리, 그는 집에 있는 것보다 일할 때 진정 더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결혼 후로 오랜 시간을 시부모와 함께 산 그에게 일터는 자신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남편만 없어도 혼자 남은 방에서 믹스 커피 대신 원두커피를 마시며 두근거렸다는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시골에 살고 싶단 그의 꿈이 이뤄질 수 있을까. 가족들의 걱정과 달리, 생각보다 잘 해내시리라는 기대가 들었다.

글 | 이승아 〈보통엄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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