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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즈 트리〉는 흉물인가

먼저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쓰레기를 투척할 수 있는 작가의 배포 또는 만용(?)에 경의를 표한다. 시민들이 이것을 쓰레기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굳이 이 작업을 대단한 현대미술로 찬양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이 작품은 비엔날레나 미술관에 출품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공공장소에 전시된 것이기 때문에 공공미술이다. 그리고 공공미술의 주인은 시민이다. 시민이 싫다고 하면 철거하는 것이 맞다. 이것을 님비(NIMBY)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변호를 좀 하고 싶다. 그것은 이 작품이 여느 평범한 흉물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괴물이라는 것이다.

  • 최범
  • 입력 2017.05.23 11:46
ⓒ뉴스1

〈서울로 7017〉의 개장과 더불어 연관 작업인 〈슈즈 트리〉가 화제가 되고 있다. 대부분 시민들의 반응은 흉물이라는 것이다. 나도 이 작업의 일차적인 반응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보았다. 나는 〈슈즈 트리〉가 흉물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흉물과 괴물의 차이를, 나는 메시지의 중심성과 코드의 구조로 구별하고 싶다. 그러니까 흉물은 메시지가 발신자의 일방적인 단일 코드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 서울 시내 곳곳에 있는 〈바르게 살자〉 같은 돌덩어리나 〈가족〉 같은 제목이 붙은 환경조형물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내가 보기에 〈슈즈 트리〉는 괴물이다. 그것은 메시지가 쌍방향적이며 코드가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냄새 날 것 같은 낡은 신발들을 수 만 개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작품은 분명 한눈에 충격적이고 불쾌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분명 폐품의 재활용을 통해 생태적인 메시지를 던지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작가의 메시지는 일방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인 코드가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관객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다양한 코드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쓰레기를 투척할 수 있는 작가의 배포 또는 만용(?)에 경의를 표한다. 시민들이 이것을 쓰레기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굳이 이 작업을 대단한 현대미술로 찬양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이 작품은 비엔날레나 미술관에 출품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공공장소에 전시된 것이기 때문에 공공미술이다. 그리고 공공미술의 주인은 시민이다. 시민이 싫다고 하면 철거하는 것이 맞다. 이것을 님비(NIMBY)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변호를 좀 하고 싶다. 그것은 이 작품이 여느 평범한 흉물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괴물이라는 것이다. 흉물과 괴물의 차이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메시지의 전달방식과 코드의 구조에 달려 있다. 나는 발신자가 단일 코드를 폭력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흉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종 기념비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환경조형물들은 흉물에 해당된다. 그것들은 거대한 권력과 고정관념의 산물들로서 우리에게 어떠한 정치적, 예술적 상상력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슈즈 트리〉는 작가의 강력한 생태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작업이며, 작품의 코드도 생각처럼 그리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먼저 우리들의 도시 한가운데에 쓰레기를 투척함으로써, 실은 우리의 도시 자체가 쓰레기임을 고발한다. 부자의 집에 초대 받은 디오게네스가 집이 너무 깨끗하여 가래침을 뱉을 데가 없자, 결국은 부자의 얼굴에 뱉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어쩌면 작가는 서울역 앞 노숙자들에 대해서도 모종의 메시지를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흉물의 얼굴은 하나이지만, 괴물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흉물이라고 이름 붙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재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괴물은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괴물의 정체는 사실 모호하고 복잡하다. 그것을 하나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괴물인 것이다. 괴물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흉포하며 더러는 천사처럼 선하다. 현대미술은 괴물을 닮았다. 대부분의 대중은 현대미술을 흉물로 보겠지만 사실 현대미술은 괴물이다. 그것이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대미술은 쓰레기이면서 동시에 보물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겉으로는 흉측하게 생겼지만, 사실은 내면이 착한 괴물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을 추악하게 만든 아버지를 저주하다 결국은 파멸한다. 그것은 자신의 추악함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서 스스로를 지우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추악한 선함이며 선한 추악함이다. 이것이 괴물이다. 흉물을 흉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쉽지만, 괴물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생각처럼 간단한 행위가 아니다.

나는 대중의 판단을 존중한다. 평론가의 입장에서 대중의 취향을 무시하고 그와 각을 세우며 나의 전문적인 안목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나 역시 추악한 현실에서 추악한 방법으로 현실을 비판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괴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평론가는 탁월한 독자'라는 정의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면, 이 작업에서 이런 코드들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에 한번쯤 귀를 기울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실 이 작업에는 유머 코드도 하나 숨겨져 있는데, 나는 이것이 제일 재미있다. 신발들이 강우규 의사 동상의 발 부분을 감싸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 강우규는 바로 조선에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사람 아닌가. 그러면 지금 이 우리들의 쓰레기 도시에 쓰레기 폭탄을 던지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그는 왜 그러는 것일까? 이들의 공통점은 테러리스트.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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