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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박근혜 착시효과' 유혹 벗어나라

좋은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김대중의 지론이다. 문재인의 서생적 문제의식은 치열하다. 상인적 현실감각도 대통령 취임 이후 진화 중이다. 1호 지시로 일자리위원회 설치를 지시하고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주요국에 신속하게 특사를 보내 외교 공백을 메웠다.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북핵과 관련해 "평화" 언급을 처음으로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뒀다. 박근혜 경제 과외교사였던 김광두 교수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 이하경
  • 입력 2017.05.23 08:01
  • 수정 2017.05.23 08:02
ⓒ뉴스1

사람은 시련을 당했을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1975년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된 법대생 문재인은 서울구치소에서 사랑받는 존재였다. 재소자들이 진정서나 탄원서를 쓸 때 도움을 주었고, 감방 동료들이 남긴 관식을 모아서 배고픈 소년수들을 먹였다. 나도 힘들지만 늘 더 힘든 약자를 배려했다.

선고일이 다가오자 감방 동기들은 석방을 기원하면서 여러 날 동안 비닐 빵봉지를 새끼처럼 꼬아 예쁜 꽃 항아리를 만들어 선물했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많으니 판검사가 되면 잊지 말고, 책상에 놓아두고 어려웠을 때를 늘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감옥 생활이 세상 공부, 인생 공부가 됐다"고 했다. 사법연수원 차석의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좌절됐다. 김앤장을 포함한 여러 로펌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했지만 "억울한 서민을 돕고 보람을 찾기 위해서" 인권변호사가 됐다. 감방 동기들의 뜻을 따른 셈이다.

이타적이고 비타협적인 길을 걸었고, 스스로도 "정치인 같지 않은 정치인"이라고 했던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것은 살벌한 정치판에서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는 "만약 권력 의지가 개인의 야망을 실현하는 의지라면 없는 게 맞다"고 믿는 사람이다. 문재인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은 결핍된 정의를 채우려는 시대의 열망이 그를 선택했고, 국정을 사유화한 박근혜와 정반대일 거라고 다수가 믿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 시민혁명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에게 혁명은 무엇일까. 노무현 정부의 민정수석이던 2005년 그는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책 한 권 들고 파리를 가다』라는 책을 추천했다. 10대 때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하방돼 농부가 됐던 중국 지식인 부부 작가의 책이다. 부부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93년』을 들고 파리를 여행한다. 프랑스 대혁명 4년 뒤인 1793년은 끝없는 혼돈 속에 루이 16세가 처형된 해다. 부부는 프랑스 혁명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18세기 프랑스와 20세기 중국에서 벌어진 혁명의 이상과 참담한 현실을 성찰한다.

문재인은 "과연 혁명이 무엇인지, 혁명이 동반하기 마련인 인간들의 광기를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질문을 읽는 이들에게 던지고 있다"고 추천사에서 적었다. 그는 지금 촛불혁명의 열망이 광기로 전환되기 전에 지체없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김이수 헌법재판소 소장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장하성 정책실장, 조국 민정수석, 그리고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라는 개혁적 인물들을 임명한 것이 아닐까.

그는 인권변호사였던 시절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인 '사상의 은사' 리영희에게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높이 평가했던 것은 오류가 아니었는지요"라고 물었다. 리영희는 "오류였지.(중략) 그때는 정신주의에 과도하게 빠져 있었던 것 같아"라고 인정했다.(『문재인의 서재』, 푸른영토) 현실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도그마에서 빠져나오려는 실용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좋은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김대중의 지론이다. 문재인의 서생적 문제의식은 치열하다. 상인적 현실감각도 대통령 취임 이후 진화 중이다. 1호 지시로 일자리위원회 설치를 지시하고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주요국에 신속하게 특사를 보내 외교 공백을 메웠다.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북핵과 관련해 "평화" 언급을 처음으로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뒀다. 박근혜 경제 과외교사였던 김광두 교수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개헌 이슈도 외면하지 않고 내년 6월까지 국민참여 방식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최측근인 이호철·양정철이 당선 직후 출국한 것도 감동의 요소다.

새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지만 어디까지나 기대치일 뿐이다. 중요한 건 실제로 만들어내는 결과다. 분열된 한국 사회에선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국정에 충실하게 반영돼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야당과 보수 기반의 인물이 국정운영에 참여할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야 한다. 김대중은 적장(敵將) 이회창 진영의 이헌재·임창열을 중용해 외환위기를 넘겼다. 박정희도 자기가 총칼로 없애버린 민주당 정부의 장관을 지낸 태완선·김영선과 감옥에 보낸 이승만 정부 장관 신현확을 기용해 초기 2년 반의 시행착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태우는 이홍구 통일원 장관을 앞세워 김영삼·김대중·김종필과 손잡고 최초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만들어냈다.

문재인은 한동안 무엇을 해도 탄핵당한 전임자와 비교돼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착시 효과'가 사라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포용과 협치 없이는 안보도, 외교도 성공할 수 없다. 싫더라도 처음부터 함께 가야 한다. 그래야 개혁도 화합도 가능하다. 그것이 '박근혜 착시 효과'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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