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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중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시예비치가 한국을 "아직 남성사회"라고 하는 이유

  • 김태성
  • 입력 2017.05.20 13:38
  • 수정 2017.05.20 13:42

"(소개령이 내려진) 체르노빌 원전 인근 지역 주민 중 나이 든 여인이 있었는데 '지금 햇살도 쨍쨍하고, 대지에 꽃도 피었고, 쥐들도 돌아다니고, 소련 병사들도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내가 왜 여기를 떠나야 하는가'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체르노빌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의 전쟁은 십여 년 만에 끝났지만 (원전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는 수만 년에 걸쳐 방사능이 지속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입니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8)는 19일 오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세미나실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새로운 전쟁'이라고 부르며 이같이 지적했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 중인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벨라루스의 여성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8)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2017.5.19

'체르노빌의 목소리' '아연 소년들' 등 원전 사고와 전쟁 등으로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온 알렉시예비치는 이날 간담회에서 한국에 대한 인상을 비롯해 자신이 왜 영웅들이 아닌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지와 앞으로 작가로서의 계획 등을 밝혔다.

한국에 대한 인상에 대해 "‘남자들의 나라구나’하는 느낌"이라고 밝힌 알렉시예비치는 "검은 제복을 입은 이들의 대부분이 남자인 것을 보고 '아직 남성사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 권력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한다면 전쟁은 좀 덜 일어날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유적으로 평범한 이들을 '작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작은 사람들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에 대해 "내 부모님도 서민이었고 나는 시골에서 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며 "부모님이 책을 좋아해 집에 책이 많았는데 책이 가진 지식의 말투도 좋았지만 길에서 만나는 서민들의 이야기들도 흥미로웠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가 놀라운데도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서 "소위 작은 사람들도 쉽지 않은 인생에서 매우 많은 큰 고난들을 겪어낸 '큰 인물'"이라고도 했다. 이어 "하지만 국가는 이들을 이용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했고, 이 역사는 거의 간과되었다"면서 "그렇기에 나는 이것이 사라지지 않게 글을 쓴다"고 덧붙였다.

7년간의 기자 생활을 했던 저널리스트 출신인 알렉시예비치는 한 작품을 쓰는 데 5~10년 걸린다고 말했다. 책 한 권에 담긴 인터뷰에 응했던 이들의 숫자는 200~500명에 달하고 인터뷰 대상자도 한번 만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5~7번 만난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수집하며 5년쯤 지나면 어떤 식으로 줄거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오고 그것에 따라 줄거리에 맞게 인터뷰를 추려내는 식으로 일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알렉시예비치는 "노벨문학상을 비롯해 유럽에서 문화 관련한 시상식에 참석할 때 '문학 대가'나 '장군'이라도 된 듯이 가지 않았다"며 "동시대인으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증인으로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또 "책을 쓴 이유는 독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동등한 이들을 만나 대화한 것을 담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체르노빌 원전사고 등을 겪은 그의 작품 속 평범한 사람들은 사랑과 죽음, 시간의 개념까지 바뀌어버린 전혀 새로운 형태의 비극에 직면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여전히 전쟁과 핵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알렉시예비치는 "'나쁜 평화보다 전쟁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질문에 "전쟁에서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다. 아울러 "소련 시절의 선전선동의 잔재가 남아 '무기 든 이들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있지만 이것은 군국주의와 다름없다"며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전쟁 자체는 살인"이라고도 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영향에 대한 우려도 이어졌다. 그는 "한국의 원전은 무사히 작동되지만 한국은 일본과 가까운 나라라 방사능이 다 퍼져있다고 생각한다"면서 핵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미 15년 전에 '체르노빌의 목소리' 책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당시 일본 독자들은 '체르노빌 사태는 러시아적 무질서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모든 게 정밀하고 정확하게 돌아가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났어요.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국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도 방사능의 힘 앞에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향후 작품 계획에 대해서는 "나는 (언젠가) '내 끔찍한 작가 인생, 광기스러운 인생이 언제 끝나나' 생각해봤다"면서 "지금까지는 큰 이념 앞의 작은 인간의 대치를 써왔는데 이제는 인간의 행복과 인간 자체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신이 보여줄 사랑 역시 고통스럽고 비극적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스웨덴) 왕실에서 '이제 무엇을 쓸 것인가' 물어 '사랑에 관해 쓰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옆의 수행원이 '아픔이 없는 글을 쓰시겠군요'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사랑이 아픔이 없는 것인가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마냥 행복하고 희극다운 내용을 쓸 수도 있지만, 진지하게 바라보면 사랑은 애통하고 비극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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