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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흥미로운 가수

ⓒOSEN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지난 몇달 홍진영보다 더 흥미로운 행보를 보인 연예인을 찾는 건 쉽지 않다. 11개월 만에 발표한 신곡 ‘사랑한다 안 한다’로는 트로트 차트 1위를 찍고 아이돌 그룹이 득시글거리는 음악방송에도 아직 자신이 설 자리가 있음을 입증했다. 출연을 결정해 놓고도 “걸그룹 콘셉트라는 기사는 봤는데 정작 저는 아는 게 없다”던 한국방송 <언니들의 슬램덩크 2>로는 10년 만에 걸그룹에 다시 도전해 끝끝내 데뷔하는 데 성공했다. 걸그룹 데뷔 과정도 어이없을 정도로 쾌속이었는데,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지난 8년간 몸에 밴 트로트 특유의 꺾기와 떨기를 걷어내고 깔끔한 팝 창법으로 노래해 속전속결로 녹음을 마치고는 개선장군처럼 녹음실을 나왔다.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부터 계속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가 또 언제 랩을 해보겠느냐”며 자신에게 랩 파트를 달라고 조르던 그는, 독선생으로 제시를 섭외해 제시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녹음파일을 보내고 교정을 받은 끝에 파트를 따냈다. 물론 실력보다는 ‘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의미를 살린 파트 배분이었다고는 하나, 랩 라이팅을 맡은 전소미와 디렉팅을 맡은 공민지로부터 시원스레 오케이를 받아낸 홍진영의 랩은 굳이 프로그램의 의미를 고려해주지 않아도 될 만큼 준수하다.

“사랑으로 감싸주세요”

일이 되려고 하면 한꺼번에 터진다고, 심지어는 작곡가로서의 데뷔가 엉뚱하게 문화방송 <라디오스타>에서 터지기도 했다. 허경환에게 주려고 썼다가 거절당했다는 곡을 들려 달라는 제안에 즉석에서 불러본 일렉트로트 ‘따르릉’은 윤종신과 김영철의 러브콜 끝에 방송 2주 만에 음원과 뮤직비디오가 발표됐다. 호시탐탐 행사용 트로트곡을 부르고 싶어했던 김영철의 욕심과 촉이 좋은 프로듀서 윤종신의 개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다른 걸 다 떠나 직관적인 훅으로 승부하는 곡 자체의 힘이 셌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트로트 신곡으로 차트를 점령하고, 일렉트로트 작곡가로 데뷔하는 동시에, 김형석의 곡을 받아 걸그룹으로 데뷔하고 노래 안에서 솔로 랩 파트를 따내는 이 모든 일이 고작 5개월 안에 일어난 일이다. 선배인 장윤정이 조금은 더 나이가 있는 청중에게 호소하고, 후배들인 소유미나 지원이가 아직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홍진영은 대학교 축제 무대와 고추아가씨 선발대회 축하 무대 양쪽에서 모두 파괴적인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사랑의 배터리’와 ‘산다는 건’을 부른 다음 전형적인 걸그룹 팝인 ‘맞지’를 지나 일렉트로트 ‘따르릉’으로 이어지는 세트 리스트를 한 무대에서 소화할 수 있단 말인가.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홍진영이 이렇게까지 광폭의 행보를 보이며 뭘 해도 되는 사람이 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가 ‘사랑의 배터리’로 처음 데뷔했을 때만 해도 그는 장윤정과 박현빈이 주도하던 젊은 트로트 가수 붐에 편승한 수많은 ‘제2의 장윤정’ 지망생 중 하나로 보였다. 작곡가 조영수가 써준 ‘사랑의 배터리’는 물론 그 힘이 셌지만, 동시에 가사를 받자마자 노래를 부르기 싫은 마음에 울었다고 회고할 만큼 가사가 유치하고 직설적이었다. 데뷔곡은 메가히트곡이 되어 19주간 트로트 차트 1위에서 내려올 줄 몰랐지만, 이게 원히트 원더가 될지 아니면 꾸준히 사랑받는 가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노래도 센 편인데 말투까지 호남 말씨면 대중의 편견을 사기 쉽다는 주변의 조언에 이 악물고 표준어로 말투를 고쳤지만, 아이돌 가수들로 가득한 대기실에 혼자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트로트 가수로 앉아 있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날이면 말 한마디 못 하고 리액션만 하다가 조용히 돌아오곤 했다.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 컷이라도 더 받아야겠다며 일부러 세게 말하기 시작하자 반응은 더 애매해졌다. 녹화 중에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던진 게스트에게 정면으로 맞받아쳐 보기도 했지만,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주눅이 들었다. 그는 데뷔 시절을 매일 울고 매일 힘들었던 날들로 기억한다.

남의 시선이야 어찌 됐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부터 일들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2013년 문화방송 <라디오스타>에 처음 나간 날 그는 같이 초대된 ‘친한 언니’ 신지와의 친분에 힘입어 사석에서 이야기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반말과 정신없이 터지는 전 남자친구 이야기, 고민을 오래 거치지 않고 바로 입 밖으로 나오는 멘트들과 무역학 박사 학위가 공존하는 이 기묘한 캐릭터는 사람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방송인데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말을 던지는 게 보기 싫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귀여운 척 애교를 부리며 눈웃음을 치는 게 다 설정 아니냐고 물었지만, “경상북도 홍보대사이지만 고향은 전라도”라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며 “경상북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뻔뻔스러움에는 미워할 수 없는 활력이 있었다.

고향 친구들이 “그냥 너던데?”라고 평했다던 그날의 토크 이후 홍진영의 인생도 조금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이틀이면 콘셉트라 했겠지만, 반말을 고쳐 존댓말로 바꾼 것 정도를 제외하면 시종일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솔직함으로 일관하는 홍진영에게 더 많은 사람이 설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연말 <라디오스타>에 다시 초대되었을 때, 자신의 최민수 성대모사에 추임새를 넣어 달라던 코미디언 윤성호의 부탁을 받고는 한없이 심드렁하게 국어책 읽기로 일관하던 모습은 더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다. 아, 저 사람은 하기 싫으면 정말 하기 싫다는 걸 숨기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지금껏 보여준 조증에 가까운 밝음도 다 진심이겠구나.

그래서 이제 우린 그가 말하는 건 거의 다 진심일 것이란 걸 안다. 가상 결혼생활이라고 예쁘고 고운 것만 보여주기 바쁜 문화방송 <우리 결혼했어요>에 남궁민과 함께 가상부부로 출연했을 때, 그는 보통의 부부들이라면 으레 그럴 것이란 생각에 남궁민에게 냉장고 청소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고, “안 그래도 다른 촬영 하느라 힘든 사람에게 저런 일까지 시키느냐”는 악플들을 보면서도 “한집에 사는 부부라면 당연히 이런 일 같이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연애 상담을 테마로 진행된<대학내일>과의 인터뷰에서 “귀여운 척한다, 시끄럽다”고 평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그는 “소신을 가지고 끝까지 자기 걸 밀어붙여야 돼. 내 거니까! 주눅 들기 시작하면 자아를 찾질 못해. 다른 것도 신경 쓸 일이 많은데 내가 갖고 있는 것조차 남들 눈치를 보면서 ‘바꿔야 하나’ 고민하면 팍팍해서 어떻게 살아”라고 답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홍진영이 죽도록 싫은데 어떻게 하죠?”라는 질문을 보고도 “사랑으로 감싸주세요 읏흥~♥”이라 직접 답글을 달았다는 그에게, 대중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숨길 생각 따위는 없다.

꾸준한 구애 끝에 얻은 소득

그러니까 지난 5개월간 홍진영에게 있었던 일들도, 자신이 원하는 걸 숨기지 않고 꾸준히 이야기하며 구애해온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일들이었으리라. 그가 과거 회사를 세번 바꿔가며 걸그룹 데뷔를 준비하다가 마침내 걸그룹 데뷔를 하고도 3개월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던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는 건 유명한 일이었고, 다른 장르와의 컬래버레이션을 갈망했다는 것도 큰 비밀은 아니었다. 올해 초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는 일렉트로닉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하며 ‘일렉트로트’에 대한 비전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홍진영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힘껏 손을 뻗어 구애했고,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쟁취했다. 덕분에 우린 정말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어느 흥미로운 30대 가수의 통쾌한 행보를 볼 수 있게 됐다. 데뷔 10년, 트로트 가수 8년차지만, 어쩌면 홍진영의 행보가 진짜 흥미로워지는 건 지금부터인지도 모르겠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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