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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혼자 산다는 것

여름에 집에 들어오다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통풍을 시키는 집이 몇몇 있으면, 신발장을 나도 모르게 보게 된다. 아 역시 남자분이 사는구나, 하며 납득하게 되는 나날. 신발장 앞에 남성의 사이즈 커다란 신발을 가져다 놓고도 문을 조금, 걸쇠를 걸어서 열 수 있는 만큼만, 딱 한 뼘만큼만, 그것도 오래는 말고 잠시 열어놓을 때마다 나는 딱 그 정도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딱 한 뼘만큼의 자유.

  • 표범
  • 입력 2017.05.19 12:01
  • 수정 2017.05.19 12:08
ⓒSnap Decision via Getty Images

나는 습관처럼 방 구하는 어플로 2호선 주변의 방을 보는데, 방을 보고 있노라면 좀 많이 울적해진다. 나는 짐이 많은 편인데다 좁은 공간에서 오래 있으면 정신적으로 무척 피폐해짐을 느껴서 건물이 다소 낡더라도 방 평수를 큰 것으로 본다. 물론 최근 들어 언제든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6월 중에 짐을 대거 팔고 버려서 처분할 생각이다. 그럼 평수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 질 수는 있겠지만.

여튼, 같은 생활권 내에서 평수 대비 가격이 저렴하려면 보통 반지하거나 일층이어야 하는데 나는 대학시절 독립한 후로 지속적인 스토킹이나 문자테러 등을 당한 적이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몰래카메라나 누군가가 나의 사생활을 지켜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이것은 비단 나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가소유의 집이 아닌 곳을 거처로 삼는 여성 모두의 일일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누군가가 내는 집 문 앞의 인기척에 놀라 쓴 글이 많은 여성분들의 공감을 얻었던 것도 절대 남의 일이라고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학시절 부동산 아저씨에게 '뭐 하느냐', '요즘도 아르바이트 하느냐', '용돈은 충분하느냐' 등의 문자를 몇 차례, 몇 개월에 걸쳐 받다가 그것을 안 아버지가 부동산을 찾아가고 나서야 그 일을 멈출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나를 관련 사건에 대한 대처법을 공부하게 해주고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사실 단단해질 필요가 없는 곳에서 스스로 단단해지려고 애쓰는 일은, 참담함과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고 이를 악무는 경험을 동반한다.

여름에 집에 들어오다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통풍을 시키는 집이 몇몇 있으면, 신발장을 나도 모르게 보게 된다. 아 역시 남자분이 사는구나, 남자분 둘이서 사는구나, 하며 납득하게 되는 나날.

신발장 앞에 남성의 사이즈 커다란 신발을 가져다 놓고도 문을 조금, 걸쇠를 걸어서 열 수 있는 만큼만, 딱 한 뼘만큼만, 그것도 오래는 말고 잠시 열어놓을 때마다 나는 딱 그 정도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딱 한 뼘만큼의 자유.

반지하가 확실히 넓네... 생각보다 채광이 좋은 걸..? 하다가도 그 창으로 들여다보일 나의 방이 누가 봐도 '여성의 관심사로 이루어진 방'으로 보일 것에 대한 두려움. 완벽한 남자의 필수품이라는 카피를 달고 버젓이 팔리는 몰래카메라에 대한 두려움. 그 댓글에 친구를 소환하며 '이거 ㄱㄱ?' '그분한테 ㄱㄱ?'를 아무렇지 않게 쓰며 몰래카메라를 유머로 소비하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

완벽남의 필수템, 아재 볼펜이라는 카피라이팅과 제품명에 의의를 표하며 '몰래카메라를 '남성성'에 대입시켜서 판매하지 말라, 남성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정작 누구냐'는 나의 댓글이 다수의 좋아요를 얻자 광고를 삭제하기보다 나의 댓글과 주변인들의 댓글을 삭제하기 바빴던 판매자에 대한 두려움. 그런 두려움들이 합쳐져 나는 한 달에 다른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월세를 낸다.

친한 남자 친구가 홍대서 7.5평짜리를 월 35를 주고 산다는 말에 그게 가능하냐고 했다가 반지하라는 말을 듣고 아.. 하고 납득하게 되는 일들. 욕조가 있었으면 좋겠고. 베란다가 있으면 더 좋겠군요. 이런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나의 SNS에서만 지껄이게 되는 것. 욕조나 베란다가 나오는 순간 찌푸려지는 부동산 관계자의 얼굴을 알기 때문에.

"아가씨, 말씀하시는 거 다 충족되는 방에 살려면 75는 예상 해야겠네요."

75... 75라.... 뉘집 개이름도 아닌데 부르기가 이토록 쉽다. 아저씨는 차라리 저를 개이름처럼 부르는 편이 쉽군요. 한심하다는 듯이 "아가씨" 하고 말예요.

일상의 괴로움을 잠시 잊는 위안을 원한다면 월 10만원 더. 겨울에도 결로가 끼지 않고 곰팡이에서 안전하고 햇빛냄새 머금은 잘 마른 빨래를 원한다면 월 5만을 더. 거기에 안전하고 넓기까지 하려면.....

사고 싶은 옷을 10번쯤 고민해서 사고, 5번 할 외식을 한번으로 줄이고, 길어버린 머리를 가끔 스스로 잘라버리고. 그렇게 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생각해보니 난 이미 그렇게 살고 있잖아?

"네.. 아 아뇨. 2층 이상으로요. 3층부터면 더 좋겠고요. 네 넓었으면 좋겠는데요.. 건물은 좀 낡아고 상관 없고요.... 아뇨아뇨, 반지하는 아무리 채광 좋고 위치 좋아도 안돼요. 네네... 아 혹시 해당 건물에 방범창 있나요? 없다면 혹시 요청하면 집주인분이 달아주실까요? 네. 아 넵 확인부탁드립니다. 옥탑이요? 옥탑 좋죠.. 근데 단독사용인가요? 다른 사람들이 올라올 수 있나요? 집주인분은 남자분인가요? 아 네네. 집 열쇠는 제가 다 받을 수 있나요? 여분 키 없이요. 분실하지 않고, 혹여 분실한다면 제가 도어락과 열쇠키를 모두 다 교체한다는 조건으로요. 네. 아 그렇군요. 그럼 관리비가 그 정도고 월세는 그 정도로 생각해야겠군요. 생각보다 예산 초과라서.. 좀 더 알아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오늘도 내 안전과 내가 지출할 수 있는 비용을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타협한다.

그렇게 산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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