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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사에서 이름을 부른 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은 이런 인물이다

  • 허완
  • 입력 2017.05.18 10:56
  • 수정 2017.05.18 10:57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진상 규명을 외치며 숨져간 네 명의 인물을 직접 호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저는 오늘,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라며 스물아홉살 전남대생 박관현, 스물다섯살 노동자 표정두, 스물네살 서울대생 조성만,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등의 이름을 불렀다. 문 대통령이 호명한 네 명의 인물을 정리했다.

1.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전남대생 박관현씨.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8월 14일 공개된 공소장에서 신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광주항쟁을 통해 내란음모를 획책한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기 위해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씨와 총학생회장 박관현씨에게 시위자금을 줬다고 꾸몄다. 정동년씨는 1988년 11월1일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고문에 의한 거짓 진술’이었다고 증언했다. 1980년 5월17일 도피해 광주항쟁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박관현씨는 2년 뒤 체포돼 40일 넘게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다 1982년 10월 끝내 숨졌다.

2.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살, 노동자 표정두.

노동자 표정두씨. 출처 :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노동자 표정두씨는 1980년 당시 대동고 학생으로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정학처분을 받았다. 이후 호남대에 입학했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워 자퇴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야학교사로 활동하며 운동을 지속했다. 이후 하남공단에 있던 신흥금속에 입사해 활동하면서 미국과 군부독재가 저지른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만행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던 1987년 3월 6일 표씨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 하적장 부근에서 등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뒤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주한 미 대사관 앞으로 달리다 쓰러졌다. 이때 행인이 발견하고 불을 끄려고 했으나 못 끄고, 교통경찰이 불을 껐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어 의사에게 “나는 광주 사람이다. 광주호남대학을 다니다가 돈이 없어서 그만두고 하남공단에 있는 신흥금속에서 근무 중인 노동자다”라고 말하며 집 전화번호와 유서를 인근 다방에 놓아두었다고 밝혔다. 분신 당시 가방 속에는 “내각제 반대” “장기집권반대”라는 쪽지와 신문뭉치 등이 들어 있었다.

3. 1988년 ‘광주학살 진상 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명동성당 교육관에서 투신하는 서울대생 조성만씨. 한겨레 자료사진.

조성만씨의 어머니 김복성씨가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오열하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5월15일. 광주 5·18 민주화운동 8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 재야민주단체 주최로 열린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 해제 촉구 결의대회’의 열기가 뜨거웠다. 이때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양심수 가둬 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공동 올림픽 개최하여 평화 통일 앞당기자!” 등의 목소리가 핸드 마이크를 타고 약 1분 동안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흰색 한복을 입은 서울대생 조성만씨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자신의 배에 꽂고 5장의 유서를 뿌리며 몸을 날렸다. 이내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조성만씨는 즉시 서울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저녁 7시, 24년이란 짧은 생을 마감했다.

투신하는 장면은 창간 사흘째인 5월17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또 다른 사진은 17일 저녁 조씨의 어머니 김복성씨가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오열하고 있는 장면이다.

4.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숭실대생 박래전씨의 장례식이 숭실대 교정에서 열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6월4일 ‘광주를 기억하라’며 몸을 사른 숭실대생 박래전씨의 장례식이 교정에서 열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인권운동가 박래군씨가 1988년 6월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한 동생 박래전씨의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읽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래전의 중학교 졸업식 직후 기념촬영을 한 박래군(왼쪽)·래전(가운데) 형제. 한겨레 자료사진.

숭실대 국문학과 학생이자 인문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박래전씨는 1988년 6월4일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자살하면서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 파쇼 타도하자.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6월6일 사망했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동생 박래전의 죽음은 노동운동을 꿈꾸던 박래군을 인권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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