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임신이 '민폐'인 나라

애 낳고 '애국자' 소리 한번 못 들어본 엄마도 있을까요? 출산이 단지 집안의 경사이거나, 부모 된 사람들을 철들게 만드는 통과의례에 불과하다면 굳이 애국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겠죠. 출산은 한 사회의 미래입니다. 엄마가 되는 일은 개인의 선택에 따른 개인들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적 사안이고 국가의 책무가 따라야만 하는 거죠. 그러나 애국자라 쓰고 저성과자로 읽는 것이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대다수의 엄마들은 일하기 위해 모성을 포기하거나 모성을 지키기 위해 일을 포기해야 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죠. 육아휴직 쓰는데 눈치 주는 사업주도 잘못이고, 임신 축하한다더니 어느덧 퇴사의 기로에 서 있는 나를 외면하는 동료들도 야속합니다.

  • 장하나
  • 입력 2017.05.08 10:31
  • 수정 2017.05.08 10:38

[장하나의 엄마정치] ④ 임신이 '민폐'인 나라

딸 두리를 출산(2015년 2월11일)하기 6일 전의 장하나 전 의원.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2014년 6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저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친정엄마와 시부모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잘 알기에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도, 의원실 동료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그저 막막한 심정이었죠. 다들 바빠 죽을 지경인데 갑작스런 임신과 출산으로 '태업'하게 된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미안했던 겁니다. 아이를 가진 게 미안해야 할 일이라니.... 저는 제 안에서 솟아나는 감정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리가 없었다면 당선됐을까

저는 임기 4년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위원으로 일하면서 '노동인권' 문제를 꾸준히 다뤄왔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 모두 (노동)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이었죠. 그런 저마저도 '임신은 민폐'라고 느끼다니! 한국 사회 안에서 엄마의 역할과 존재가 얼마나 하찮게 취급받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습니다.

엄마가 되면서 화나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자주 억울한 기분이 들었고 내가 정말 사회적 약자라는 생각, 그중에서도 최하층민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죠. 그러나 정작 가장 화나는 대상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늘 미안한 기분을 가지고, 온갖 차별과 부당함 앞에 찍소리 한번 못 하는 내 모습에 짜증이 난 겁니다. 아마 대한민국 여성 노동자의 99.9%는 저와 비슷한 마음 아니었을까요? 아이를 가지면 예전만큼 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얼마간 일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동료들과 사업주에게 미안해지는 거죠.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저는 미안한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부터 아이를 낳고 복귀하고 낙선하고 임기를 마치는 순간까지 저는 늘 미안했던 거죠. 젖먹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선거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어쩌면 낙선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애 엄마라서 지지자분들과 혼신을 다한 동료들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죄스러웠죠. 두리의 탄생은 그만큼의 가치가 없는 일었을까요? 국회의원이 대체 뭐라고 한 생명을 부끄럽게 여겨야만 했을까요?

이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죄책감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이죠. 제가 틀렸던 겁니다. 그리고 저를 미안하게 만든 이 사회는 정말 단단히 틀려먹었습니다. 제 딸이 자라나서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일이 없도록 세상을 바꿔야죠. 다시는 그 누구도 엄마라서 울지 않도록.

저는 임신 기간 내내 '괜찮아요. 임신이 체질인가 봐요' 이 말을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동료 국회의원들께는 임신 사실을 굳이 알리지도 않았죠. 같은 상임위 소속 의원님들과 몇몇 여성 의원님들 외에는 저의 임신 사실을 출산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2월생이었고, 정기국회 이후에는 회의가 자주 열리지 않기 때문에 품이 넉넉한 코트 안에 만삭의 몸을 숨길 수 있었던 거죠. 어차피 들통 날 일을 왜 굳이 숨겼을까요?

저는 2012년 당시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청년 비례대표 공모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정치 약자인 청년층에 비례대표 2석(애초에는 4석을 약속)을 배정한다는 것은 정당 입장에서는 기득권의 포기 또는 양보라고 할 수 있죠. 청년 비례대표는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제도라는 위기감이 늘 존재했고, 저의 임신과 출산이 구실이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젊은 여성을 뽑아 놓으니까 애 낳고 일 쉬는 거 아니냐. 청년비례 제도에 문제있다'는 식의 말을 듣기 싫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누가 문제 삼기도 전에 스스로 엄마의 권리를 포기했고, 인간 장하나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엄마의 숙명은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비켜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 엄마라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국회의원 시절에 엄마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정치 이슈로 부각시키지 못한 점을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엄마(부모)가 된다는 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정부의 책임과 엄마 정치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저야말로 저의 출산을 철저히 사적인 일로 치부했던 겁니다. 엄마 국회의원이 엄마들의 문제를 제대로 대변하지 않은 것은 엄마들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본회의장에서 수유한 엄마 의원의 정치

2015년 7월 아르헨티나의 빅토리아 돈다 페레스 하원의원이 본회의장에서 수유를 한 일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르헨티나의 인권 수준이 높아서 그런가 보다,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라고 생각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페레스 의원의 행동은 과감한 정치 행위였고, 용기있는 행동이었고 논란이 분분했던 만큼이나 가치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깊게 성찰하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크나큰 후회로 남습니다. 엄마가 아닌 척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던 제 모습은 화인(火印)처럼 지워지지 않는 쓰라린 기억이 되었죠.

이제 저는 일 못하는 엄마라서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예전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서 아쉽고 답답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동료들에게 폐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미안해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 거죠. 내가 한 아이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키우는 것은 당신들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나는 나의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보다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이죠. 내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와 두리의 존엄성을 되찾는 것에서 엄마 정치를 시작해봅니다.

애 낳고 '애국자' 소리 한번 못 들어본 엄마도 있을까요? 출산이 단지 집안의 경사이거나, 부모 된 사람들을 철들게 만드는 통과의례에 불과하다면 굳이 애국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겠죠. 출산은 한 사회의 미래입니다. 엄마가 되는 일은 개인의 선택에 따른 개인들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적 사안이고 국가의 책무가 따라야만 하는 거죠. 그러나 애국자라 쓰고 저성과자로 읽는 것이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대다수의 엄마들은 일하기 위해 모성을 포기하거나 모성을 지키기 위해 일을 포기해야 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죠. 육아휴직 쓰는데 눈치 주는 사업주도 잘못이고, 임신 축하한다더니 어느덧 퇴사의 기로에 서 있는 나를 외면하는 동료들도 야속합니다.

그러나 임산부 차별 문제의 최종적인 책임은 역시나 정부에 있습니다. 현행법상 여성 노동자는 90일의 출산전후휴가와 1년 이내의 육아휴직을 보장받아야 하지만, 법의 보호를 받는 엄마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죠. 지난해 7월 국무조정실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 '취업여성의 일·가정 양립 실태와 정책적 함의'에 따르면, 첫째 자녀 출산 전후 6개월간 취업 중이던 여성 노동자의 44.6%가 경력단절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직종별로는 공무원·국공립교사의 11.2%만이 경력단절을 겪는 반면, 일반회사 종사자의 49.8%가 출산 뒤 일을 관두는 형편이죠.

또한 2001년 이후 출산한 여성 노동자 중에 육아휴직을 사용한 사람은 41%로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공무원·국공립교사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75%인데, 일반회사 종사자의 경우는 34.5%에 불과해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고속도로에 속도제한 표지판만 있고, 단속카메라도 교통경찰도 없다면 규정 속도를 지키는 운전자는 몇 퍼센트나 될까요? 음주운전 단속도 마찬가지고요. 엄마들이 '애 낳은 죄인'의 심정으로 직장에 다녀야 하는 것은 바로 고용노동부의 직무유기 때문입니다.

노동부의 입장을 들어보면 더욱 기가 막히는데요. 육아휴직을 신청했는데 사업주가 반려한 경우에 대해서는 행정적 조치를 할 수 있지만, 육아휴직을 포기(미신청)한 경우는 자발성 여부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노동부는 공무원과 민간기업 종사자의 육아휴직 사용률이 왜 두 배 이상 차이 나는지 정말 짐작조차 못하는 걸까요? 궁금하지도 않은 걸까요? 회사에서 눈치 보느라, 불이익과 차별이 두려워서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노동부만 까맣게 모를까요? 저출산 문제에 국가의 미래가 달렸다면서 가임기 여성 지도까지 만드는 열성을 보여준 정부에 요구합니다. 정말 필요한 건 대대적인 육아휴직 사용실태 조사를 통해 일·가정 양립 사회로 나가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짜는 일이라고요. 대선을 앞두고 온갖 장밋빛 공약이 난무하는 가운데 육아휴직 기간을 3년으로 늘린다든가 육아휴직 급여를 두 배 인상한다는 말들이 썩 반갑지 않은 이유는 결국 노동부의 집행 의지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노동부의 인력 부족 탓, 예산 부족 핑계는 크게 변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죠.

두리가 입을 옷들이 출생 4일 전(2015년 2월7일) 두리를 기다리고 있다.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폐기된 '육아휴직 보장' 법안들

저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왜 엄마들이 육아휴직을 쉽게 포기할까, 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걸까 의아했습니다. 근데 제가 아이를 가져보니 비로소 알겠더군요. 엄마는 뱃속의 아이를 위해 갈등상황을 자연히 회피합니다. 나의 노동권과 모성권에 대한 권리의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육아휴직을 요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서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면서까지 끝까지 싸울 것인가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이죠. 출산 직후에는 아이 돌보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내야 하기에, 결국 여성 노동자는 서서히 차별에 굴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리를 낳고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사업주의 허락이 없어도, 노동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근로기준법·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습니다.

'근로자가 통보한 휴가 개시 예정일에 사용자가 휴가를 주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근로자가 통보한 출산전후휴가 개시 예정일에 해당 휴가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는 조항과 '육아휴직을 신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주의 명시적인 허용의 의사 표시가 없는 경우에는 사업주가 근로자의 신청에 따라 육아휴직을 허용한 것으로 본다'는 조항을 각각 신설하는 개정안이었죠. 간단명료한 이 두 법안은 심의 한 차례 받지 못하고 임기만료 폐기되었지만, 다행히 지난 3월 더불어민주당의 이용득 의원이 다시 발의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가 경쟁적으로 모성권 보호를 약속하는 지금, 대선 직후 열리는 국회에서 이 법안들이 심의되는지 지켜볼 일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순간 '엄마 정치'는 시작됐다

지난 4월22일 '엄마 정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엄마들이 드디어 만났습니다. 호기롭게 첫 모임(서울시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을 제안했지만 대체 어떤 분들이 오실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무척 설레고 또 두려웠습니다. 물론 이날 함께한 30명의 엄마들은 저보다 더 막연한 심정으로, 더 큰 용기를 내어 참가하셨겠죠. 저도 엄마들도 '그래 부딪혀보자'는 마음 하나로 서로를 만났습니다.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면 우리의 만남이 대화와 공감과 위로로 끝나버리면 어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엄마 정치세력화'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의 역할은 '제안자'일 뿐 마음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가다듬었죠.

예상대로 30명의 엄마가 각자의 삶과 경험을 나누는 동안, 말하는 이도 듣는 이들도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자기소개만으로 예정했던 2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저는 2시간 만에 그 엄마들에 대한 어떤 믿음이 생겼습니다. 멀리 울산과 세종시에서부터 달려온 엄마들, 갓 백일이 된 둘째를 품에 안고 5살 첫째의 손을 꼭 잡고 나타난 그녀들에게 무엇을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각자의 집을 나서는 순간 엄마들의 정치 행동은 이미 시작되었던 겁니다.

행사를 마치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엄마들은 한 시간 만에 '정치하는 엄마들 준비위원회'의 발족을 결의했는데, 저만 빼고 아무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는 사실에 더 놀랐습니다.

앞으로 '정치하는 엄마들(준)'은 보육·교육정책, 여성의 노동과 고용 문제, 환경 및 보건의료 정책을 함께 고민할 계획입니다. '맘충'으로 표상되는 혐오 시선의 문제와 독박육아에서 평등육아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인식 개선 캠페인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5월13일과 6월11일에 열리는 2차, 3차 모임에도 많은 참여 바랍니다. 자세한 정보는 페이스북 엄마정치(www.facebook.com/groups/political.mamas/)를 참고해주세요.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임신 #육아 #정치 #사회 #장하나 #육아휴직 #여성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