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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른다고 그들의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박근혜 때 아무말 하지 못하고 조용히 숨죽여 지내던 성소수자들이 문재인이 대통령 되려니까 나대고 있다"고 말한 이들이. 그리고 그 말에 동조한 많은 이들이 '그곳'에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성소수자 동지들이 언제나 '그곳'에서 연대했던 것은 똑똑히 안다. 당신들의 지레짐작과는 다르게 이 사회에 곳곳에는 무지개 깃발이 나부꼈고, 힘들어하고 절망스러워하던 사람들 주위에는 언제나 성소수자 활동가 동지들이 친구로서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당신이 보지 못했다고 쉽게 그들의 역사를 지우지 마라. 당신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누군가의 존재와 목소리를 깡그리 무시하지 마라.

ⓒ김민수

명동성당을 따라 쭉 내려오다보면 보이는 잘빠진 증권가 고층빌딩, 지금은 높고 건조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그곳은 7년 전엔 용역과 시민들이 부대끼며 몸싸움을 하던 곳이었다. 이따금 용역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며 작전을 시작하려 할 때, 거길 지키던 사람들은 문자메시지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마리로 모이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철거를 막아보겠다며 모였던 사람들, 밤마다 먹을 걸 나누고 같은 노래를 불러대던 사람들, 때론 욕지거리를 하며 자그마한 몸들을 모아 용역을 막아내던 사람들이 있던 그곳 . 명동의 한 가게, 다 부서진 마리에는 무지개 깃발이 있었다.

2011년 북아현동에는 재개발 광풍이 불었다. 쫓아내야 하는 사람들과 쫓겨나길 거부하는 사람들의 크고작은 싸움이 이어졌다. 제 품삯만큼을 하겠다고 으르렁대던 용역들이 버티던 사람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가재도구를 박살냈던 그날, 잿더미같이 변해 속살을 드러냈던 작은 가게 앞에서 쫓겨난 중년 부부가 자그마한 천막을 치며 718일의 투쟁을 이어가던 북아현의 하늘엔 종종 무지개깃발이 하늘에서 펄력였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의 숫자는 하나씩 더해져 스물 여덟을 채웠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는 점점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해고노동자들은 대한문 앞에서 겨우 목숨줄만 붙이며 투쟁하고 있었다. 늘 향냄새가 났던, 삶과 죽음의 분기점과 같았던 그곳에도 종종 무지개깃발이 세워졌다. 어느날 서울시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치우고 화단을 세운다고 했다. 꽃에 밀려 사람이 울고 넘어졌던 그날, 꽃을 덮을 흙이 죽은 해고자의 검은 영정사진을 덮었던 그날에도 역시 무지개깃발은 있었다.

유명자 지부장은 거리에서 3,000일 가까이 보냈다. 시청광장 옆 재능교육 본사 앞에 쳐놓은 천막에서 유 지부장은 자동차소리를 들으며 매일 밤을 보냈다. 부당해고가 억울하다며 8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그는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래도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고 고백했다. 너무 추워 버티기만 하기도 고되었던 그날, 칼바람이 뺨을 스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혹한의 어느날에도 무지개깃발은 있었다.

그날 물줄기는 살해의 의도가 명백했다. 사람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그 물대포는 작고 늙은 노인을 쓰러뜨렸다. 노인은 그 후 1년 간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병원에 있었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자 살인범으로 지목된 공권력은 자기들을 향한 시비를 막고자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강제부검하려고 했다. 백남기를 지켜내겠다는 시민들, 강제로 부검을 진행하겠다는 경찰의 대치는 40여일간 지속되었다. 죽은 노인의 지난했던 삶을 지키기 위해 장례식장에 모여든 사람들 속에는 여전히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다.

제 아이의 죽음을 밝혀달라던 부모의 절규가 노랗게 서린 그곳. 고작 잊지 말자는 말에 거센 반발을 받아야 했고, 곡기를 끊은 아비와 어미 앞에 누군가 피자를 시키며 조롱했던 그곳. 거대 야당이 야합에 가까운 특별법을 내놓아 유가족들이 또 한번 좌절에 빠졌던 광화문광장에도 역시 무지개 깃발은 나부꼈다.

대통령은 제 탐욕을 위해 끝까지 자리를 사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몇번의 요식적 사과로도 국민들의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자 버티기를 시전했다. 하나 둘씩 모였고 그렇게 천육백만명이 모였다. 광화문 광장은 하늘 별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있었다. 대통령은 쫓겨났고 시민들은 겨우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 모였던 그곳 어딘가엔, 반드시 무지개 깃발이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때 아무말 하지 못하고 조용히 숨죽여 지내던 성소수자들이 문재인이 대통령 되려니까 나대고 있다"고 말한 이들이. 그리고 그 말에 동조한 많은 이들이 '그곳'에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의 성소수자 동지들이 언제나 '그곳'에서 연대했던 것은 똑똑히 안다. 당신들의 지레짐작과는 다르게 이 사회에 곳곳에는 무지개 깃발이 나부꼈고, 힘들어하고 절망스러워하던 사람들 주위에는 언제나 성소수자 활동가 동지들이 친구로서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당신이 보지 못했다고 쉽게 그들의 역사를 지우지 마라. 당신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누군가의 존재와 목소리를 깡그리 무시하지 마라. 내가 기억하는 무지개 깃발은 가장 강력한 시민의 연대 중 하나였으며,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했던 내 동지이자 곧 우리였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

민중총궐기, 그리고 성소수자들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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