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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보라고 하지 마세요

시각장애인에게 손은 눈 대신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맞다. 분명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만져 보는 것이 정보를 습득하는 훨씬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러나 코끼리 다리가 그렇고 모래알이 그렇듯 모두 만져본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둘러 앉은 식사자리에서 시각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해서 그에게만 손으로 모든 음식을 집어 먹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Mateusz Jaszak / EyeEm via Getty Images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때 우리 학교에는 매우 적극적인 교육을 시도하시던 여선생님이 계셨다. 교과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물들을 실물로 보여주시면서 교육내용을 실제의 경험으로 옮길 수 있는 것에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생님은 상상도 못할 새로운 교구로 또 하나의 파격적인 수업을 계획하셨다. '남자와 여자' 뭐 이런 비슷한 주제로 기억되는 그날의 수업시간! 선생님께서는 내게 다가오셔서 본인의 몸을 만져보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고 계셨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를 위해 엄청난 고민 끝에 내리신 결정이었겠지만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던 10대 후반의 혈기왕성한 중학생에겐 의도한 교육적 효과는 전혀 발생되지 않고 있었다.

엉뚱하고 야릇한 상상들과 남성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들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시뻘개진 얼굴로 결국 아무 명령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채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스무살 무렵 어느 봉사단체에 강연자로 초대되어 갔을 때 모임 대표의 발언을 들으면서 난 그 때의 선생님과의 사건을 또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에티켓을 설명하던 그녀의 원고내용은 너무도 공감이 갈 만큼 철저한 준비가 동반된 것 같았다.

단 한 가지 그 내용만 없었다면 완벽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가던 그녀가 중요한 내용이라며 강조해서 설명하던 마지막 내용에 난 정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은 스킨십을 좋아해요. 적당한 정도의 터치는 악의 없는 인사이니 당황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하니 먼저 얼굴이나 몸을 살짝 만져보게 해 주는 것은 친구들과 더욱 빨리 친해질 수 있는 아주 좋은 팁이지요. 이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편한 인사이고 서로를 알기 위한 교류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치 어느 다른 나라의 몰랐던 문화라도 설명하듯 친절하고 자세한 그렇지만 출처도 근거도 없는 그녀의 괴변 덕분에 나의 강의내용은 순간적으로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백여명의 여대생들 앞에서 그날 나는 당신이 첫 인사로 나에게 당신의 몸을 만지게 했을 때 나의 감정상태가 어떻게 변해갈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응큼한 의도로 그 인사법을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신이 코가 두 개이거나 머리가 세 개인 정도의 큰 독특함이 없다면 내가 당신을 만져본다 하더라도 특별히 당신의 외모에 대해 자세히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과 어떤 이성의 시각장애인이 당신을 만져보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시각장애인만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그냥 남성의 본능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그날 이후에도 적지 않은 첫 만남의 여성들이 나에게 본인의 몸을 만져보게 해주려 애쓰기도 했고 그때마다 난 나의 이성을 지키기 위해 또 한 번 굳은 결심으로 건강한 나의 본능들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

시각장애인에게 손은 눈 대신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맞다.

분명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만져 보는 것이 정보를 습득하는 훨씬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러나 코끼리 다리가 그렇고 모래알이 그렇듯 모두 만져본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의 욕구가 다른 이의 큰 희생이 동반되어야 하거나 기본적 윤리와 대치될 때 혹은 약함을 무기 삼아 다른 욕심을 부릴 때 그것은 냉정하게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둘러 앉은 식사자리에서 시각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해서 그에게만 손으로 모든 음식을 집어 먹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길을 찾거나 형태를 보지 못하므로 차도로 걸어다니거나 시장의 물건을 걷어차더라도 시각장애인에게만큼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느 아름다운 영화에서 시각장애인 남성이 그의 연인을 더듬어 가며 그녀를 느끼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영화이기에 가능하고 더더욱이 그들은 연인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상식의 범위를 넘어선다면 또 다른 깊은 고민이 동반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또 다른 곳에서 수많은 이성들을 만나겠지만 더 이상 나에게 몸을 만져주기 위한 고민은 하지 않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나도 이제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의 힘든 갈등을 멈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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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 #시각장애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