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에 걸쳐 대선후보의 TV토론을 지켜봤는데, 내 느낌은 한 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사실 단지 실망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토론을 보는 시간 내내 엄청나게 짜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나라를 이끌겠다고 나선 사람들 사이의 토론이 겨우 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선후보의 토론이란 나라를 이끌어나갈 경륜과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말의 잔치여야 하지 않습니까?
토론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국민이 누구에게 나라를 이끌 소임을 맡길지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내가 본 두 번의 토론에선 자신의 의견을 내팽개치고 남 헐뜯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후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토론을 통해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의미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론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토론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으로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가 되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케인즈(J. M. Keynes)가 어떤 상황에서 말을 바꿨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비난에 대해 케인즈는 "상황이 바뀌면 의견도 바뀌는 법입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맞받아쳤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 일화가 말해주듯, 어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그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느냐입니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고,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합니다.
지난 두 번의 TV토론에서는 중요하기 짝이 없는 미래가 실종되고 오직 과거 얘기만 판을 쳤습니다.
국민이 듣고 싶은 것은 앞으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에 대한 대답 아니겠습니까?
토론의 정도(正道)는 이렇게 국민이 듣고 싶은 답을 이끌어내는 질문을 하는 것이라는 데 한 점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후보를 헐뜯는 질문은 이미 며칠 전의 KBS의 TV토론에서도 숱하게 등장했습니다.
다른 TV토론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들고 나오면 시청자들이 피곤해지지 않습니까?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듣기 거북한 법인데, 확실한 답도 안 나오는 걸 갖고 매번 말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보기가 좋지 않더군요.
대선후보들의 자질 검증은 언론을 통해서 계속 행해지고 있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유권자들이 혼란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자질 검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질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고 대통령을 뽑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 우리로서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될 테니까요.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구도는 언론에 자질 검증의 일을 맡기고 토론에 임한 후보들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는 분업체제입니다.
지금과 같은 토론의 분위기에서는 각 후보가 어떤 비전을 갖고 나라를 이끌 것인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두 시간이나 되는 토론을 상대를 헐뜯는 말싸움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비전이 제시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보기에 대선후보들은 상대 후보에게 질문을 할 때 토론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 후보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돋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토론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가 똑같다고 볼 수 있지만, 어디에 포커스를 두느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격의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사이에 좋은 정책대안이 스스로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것이 건설적인 토론이고, 이렇게 건설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이 기본적 예의입니다.
내가 지켜본 두 번의 TV토론은 그런 기본적인 예의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순전히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의도의 질문이 판을 쳤고, 심지어 토론주제와도 상관없는 질문들도 많았습니다.
그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토론의 분위기는 전혀 대선후보들의 토론답지 못했습니다.
만약 앞으로의 토론도 지난 두 번과 비슷하게 진행된다면 공연히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송국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유권자들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좋은 대통령을 뽑는 일에 그런 방식의 토론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 이 글은 필자의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