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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투표의 경제학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표현 하나는 바로 '서민' 입니다. 서민으로 살아가는 중간자들의 투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안희정 지사가 더민주당 경선 시 대연정을 제안하고 다소 보수적인 노동·경제 정책들을 들고 나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우클릭을 보이고 자유한국당과의 연정을 시사하는 이유나, 더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복지정책에서 다소 후퇴하고 사드 배치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유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중간자들에게 구애를 펼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간자들은 이렇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뉴스1

[김재수의 갑을 경제학] 선거와 투표의 경제학

강의 중 가장 목소리가 커지는 순간은 정실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의 돈이 어떻게 거대 기업들로 흘러들어 가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수많은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또는 분노해 달라고 학생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나 당황, 놀람,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학생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재 개그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학생들이지만, 이들에게서 분노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나요? 65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미국의 건강보험 메디케어는 제약회사와 가격 협상을 벌일 수 없습니다. 대량의 약을 구매하는 소비자로서 스스로의 손과 발을 묶는 법안이 부시 정권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주머니에서 나간 50억 달러 정도의 세금을 매년 제약회사에 선물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알고 있나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미국의 인터넷 서비스 속도는 느리고 가격은 비쌉니다. 한 가지 이유는 시장지배력을 지닌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이 막대한 정치 자금을 제공하여, 광섬유케이블의 설치를 막는 법안과 경쟁을 막는 규제들을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기업들과 달리 모기지 대출과 학자금 대출은 파산의 경우에도 채무 조정이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나요? 법인세 계산 시 CEO들의 천문학적 연봉은 공제 가능하고, 결국 이러한 부담은 우리 시민들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대부업체의 약탈적 대출이 이루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금융위기 때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기관들이 보인 행태를 알고 있나요?"

아무리 많은 예를 제공해도 소용없습니다. 감정의 동요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저의 강의는 낙제라 할 수 있습니다.

대중의 합리적 무시와 내부자들의 합리적 조작

경제학자인 저는 학생들의 무심함을 쉽게 비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심드렁한 반응은 경제학이 그토록 강조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에 의해 명명된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란 새로운 정보를 통해 얻는 혜택보다 정보 취득 비용이 큰 경우,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적 참여를 요구하는 긴급하고 중요한 정보들이 왜 많은 시민에 의해 무시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경제학 이론입니다. 나 한 사람이 정치적 참여를 한다 한들,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상당히 큽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인간들은 아무리 불공평한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무관심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미래가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선거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보자들의 면면과 공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 표로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선생은 학생들의 합리적 무시와 힘겹게 싸워야 하지만, 대중의 합리적 무시를 반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막대한 크기의 사적 이득을 얻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경제학자 맨서 올슨은 이들을 '특수 이익집단'이라 불렀고, 경제학자 고든 털럭은 이들을 '지대 추구자'로 불렀지만, 우리는 이들을 '내부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대중의 합리적 무시'라는 표현에 빗대어 말해 보면, 내부자들은 정치 참여의 편익이 비용보다 훨씬 크므로 세상을 합리적으로 조작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조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배력을 가진 기업이 정치 권력에 로비를 펼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법, 규제, 세금 정책을 유리하게 만들고 경쟁의 룰을 불공평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글로벌 초일류를 자랑하는 기업의 대표가 부당한 경영권 승계를 위해, 대통령 친구의 딸에게 경주용 말을 사주고, 대통령이 친구와 함께 소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업체에 돈을 대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우 비현실적으로 들리겠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다행인 것은 이 사건이 너무나 황당해서, 대중이 합리적 무시를 극복하고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또 다른 공생의 방식은 정부의 고위 공무원들에게 미래의 일자리와 소득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친서민 정책을 포퓰리즘으로 비판하고 친기업 정책을 우대하면, 나중에 대기업의 사외이사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삼성그룹의 사외이사 절반 정도가 재경부, 국세청, 금감원, 공정위 같은 정부 공무원 출신입니다. 내부자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 가는 세상을 경제학자들은 정실자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영화 '내부자들'은 이들의 공생 방식을 상상하며, 대기업 회장, 대선 후보, 신문사 주필이 성접대까지 함께 받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자극적인 영화의 상상력이 오히려 현실의 냉정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재미없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관심하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현실을 극적으로 담아낸 대사와 장면들도 많이 있습니다. 미래자동차의 오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구린 놈끼리 가야지 냄새를 풍겨도 괜찮지 않겠나?"

누가 내부자들에게 맞설 것인가 - 중간자들

합리적 무시 이론 외에, 경제학자들이 선거와 투표를 말할 때마다 가장 많이 소개하는 이론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경제학자 호텔링, 블랙, 다운스에 의해 정립된 '중간투표자 이론' (median voter theorem) 입니다. 다수결 투표제하에서는 중간에 위치한 투표자가 선호하는 대안이 선택된다는 이론입니다. 여느 이론처럼 현실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단면을 설명해 줄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표현 하나는 바로 '서민' 입니다. 서민으로 살아가는 중간자들의 투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안희정 지사가 더민주당 경선 시 대연정을 제안하고 다소 보수적인 노동·경제 정책들을 들고 나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우클릭을 보이고 자유한국당과의 연정을 시사하는 이유나, 더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복지정책에서 다소 후퇴하고 사드 배치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유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중간자들에게 구애를 펼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간자들은 이렇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선거철이 아닌 때에도 중간자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4대강과 자원외교의 손실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간자들이 무관심하고 분노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후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도는 40%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중간에 대충 끼어서 대충 잘 먹고 대충 잘살고 있는 우리 중간자들은 대충 서성이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대충 잘살고 있던 중간자들이 연말정산을 하다가 세금이 조금 늘었다고 하자, 잠시 성질을 부렸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도가 29%로 떨어진 것입니다. 결국 세금 부담을 일부 완화하자 중간자들은 화를 풀었습니다. 한편 대충의 삶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던 중간자들도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터지자 분노를 폭발했습니다. 내부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관련 내부자들을 감옥에 보냈습니다.

합리적 무시 이론은 내부자들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고 설명하지만, 중간투표자 이론은 평범한 시민들도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중간자들이 내부자들의 공모를 합리적으로 무시하면, 세상은 내부자들의 것이 됩니다. 반면 내부자들과 맞설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지닌 이들도 바로 깨어있는 중간자들입니다.

선거, 우리가 변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을까

경제학자들의 광범위한 연구에 따르면, 시민들이 지닌 사회적 자본은 경제발전 및 사회의 다양한 제도의 작동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① 관련논문 바로보기) 사회적 자본이란 시민들의 협동, 참여, 사회적 교류, 신뢰를 의미하는데, 이들이 선거 결과와 민주주의의 작동에도 큰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보코니 대학의 난니치니 교수 연구팀은 이탈리아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와 당선자들의 의정활동을 분석하여, 사회적 자본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② 관련논문 바로보기) 사회적 자본은 각 선거구의 평균 일 인당 헌혈 횟수로 측정했습니다. 정치인들의 부정행위는 두 가지 지표를 통해서 살펴보았는데, 하나는 범죄 행위에 대한 검찰 기소 여부와 다른 하나는 법안 투표의 불참 횟수입니다.

분석에 따르면, 사회적 자본이 상대적으로 적은 선거구에서는 당선자들의 부정행위가 더 많았습니다. 반면 사회적 자본이 높은 선거구에서는 부정행위를 했던 정치인의 낙선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입법안을 살펴보니, 사회적 자본이 적은 선거구에서 특정 이익집단을 위한 입법안이 공익 목적의 입법안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앞서 소개한 일련의 경제학 연구들을 생각해 볼 때, 선거와 투표는 단순히 지지 후보의 승리를 위해 싸우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내부자들과 중간자들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더욱 중요하게는 중간자들로 살아가는 이웃들과 소통하고, 중간자들에게 사회적 자본의 든든한 지원을 보내며, 중간자들로 하여금 깨어있는 시민의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요청하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선거는 우리 모두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간입니다.

각 후보의 열혈 지지자들은 상대 후보를 비난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당선시켜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결정하는 힘을 지닌 이들은 열혈 지지자들이 아니라 중간자들입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도 자신의 지지 후보가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지닌 중간자들입니다. 중간자들이 차별에 맞서고 연대하는 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책임 있는 정치인들을 선출하고, 무책임한 정치인들을 처벌할 수 있습니다. 중간자들이 합리적 무시를 극복하고 공공성을 추구할 때, 정치인들은 내부자들과의 공모를 포기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내부자들과의 싸움을 송곳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맡겨두고, 그들의 희생에 기대어 살아왔습니다. 촛불혁명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중간자들이 힘을 합쳐 내부자들과 싸워 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촛불혁명 후의 선거, 중간자로 살아가는 우리와 이웃들은 과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변할 수 있을까요.

◎ 관련논문

① Alesina, Alberto, and Paola Giulino.2015. "Culture and institutions." Journal of Econcmic Literature.53(4):894-944.

② Nannicini, Tommaso, Andrea Stella, Guido Tabellini, and Ugo Troiano.2013. "Social capital and political accountability." American Economic Journal: Economic Policy. 5(2):222-50

* 이 글은 한겨레 Weconomy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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