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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이의 군대일기

제대 일주일 전쯤, 별 생각 없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헌법재판소 군대 내 동성애 행위 처벌 합헌" 그 잠깐 본 한 줄로 몇 시간 동안 내 사고와 감정은 소화불량이었다. 답답한데 무엇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풀어낼 곳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군대에서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정신을 조금 차린 후에, 그래, 커밍아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군대에서 나를 알고 지냈던 이들의 귀에 "야! OO이 게이였데." 라는 가십이 들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 혹은 욕을 할 때, 잠깐이나마 내가 생각나길 바란다.

전쟁없는세상 주: 최근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이 군대 내 동성애자를 색출하여 처벌할 것을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실제로 A 대위가 구속 기소 되었습니다. 전쟁없는세상은 이 사건이 심각한 동성애 혐오이자 인권 침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복무조차 허용하지 않고 억지로 군대에 끌고간 뒤 성소수자라고 처벌해서 범죄자로 만드는 건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쟁없는세상은 성소수자 색출에 반대하며, 이 사건이 얼마나 몰상식적이고 반인권적인지 알리기 위해서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군대에서 겪은 일을 블로그에 싣기로 했습니다.

글 | 덕현(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훈련소, 희미한 잠결속에서 들리는 이야기.

"잘못해서 게이야동을 받았는데 남자가 후까시 해주는 거 봤어."

"아~ 더러워" "눈버려!"

다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한마디씩 내뱉는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 상상하기도 싫은 일.

나는 그날 밤 그들이 역겨워 마지 않는 장면들을 상상하며 자위한다.

육군에서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외로웠다.

나의 욕망들이 변태 짓거리로 여겨지는 그곳에 고립되었던 시간들이 다시 내게로 왔다. 여자얘기들, 동성애혐오 농담들이 정상인 군대에서 철저히 혼자였던 나는 가끔씩 숨쉬기 힘들만큼 가슴이 아팠고, 고통을 몸으로 드러내고 싶어 자해의 욕구를 느꼈다. 그럼에도 군대에 있는 그 사람들이 내가 유일하게 이야기하고 기대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의 군대 내 성소수자 색출 및 처벌, 그리고 A 대위 구속 기소에 항의하며 4월 21일 국방부 앞에서 열린 항의 집회. 사진출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가끔식 군대에서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한다고 하면 너무나 피하고 싶었다. 군대는 동성애자를 성폭력 가해자로밖에 보지 못했다. 어느날 교육에서는 다른 부대에서 있었던 동성간 성추행 사건을 이야기했다. 가해자는 서로 좋아서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에 충격받아 우울증에 걸렸다고 했다. 간부는 무슨 어이없는 일이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부대원들은 이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난 슬펐고 가슴이 아팠다. 동성 간의 합의된 성관계조차 군형법으로 처벌하는 군대에서, 그리고 동성애 혐오가 정상인 군대 문화에서, 가해자/피해자로 그 둘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저들은 뭐가 웃긴 걸까? 공유되는 그 동성애혐오가 끔찍했다.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이 끝나고 화장실에 오줌 싸러 갔는데, 들려오는 이야기들.

"시X, 게이 새끼 때문에 우리가 왜..."

"게이 새끼들은 모두 고추를 잘라버려야 해."

무섭지 않았다. 화나지도 않았다. 난 그저 벽이 되고 바닥이 되고 사람이 아닌 게 되었다.

군대 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많은 이들은 동성간 성희롱/성폭력을 말한다. 그것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성소수자 군인의 모든 것인 것처럼. 성적지향과 관계없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성폭력은 사라져야 한다. 왜 우리는 같이 성폭력에 반대하는 동시에 성소수자 인권을 옹호하지 못할까?

제대 일주일 전쯤, 별 생각 없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헌법재판소 군대 내 동성애 행위 처벌 합헌" 그 잠깐 본 한 줄로 몇 시간 동안 내 사고와 감정은 소화불량이었다. 답답한데 무엇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풀어낼 곳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군대에서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정신을 조금 차린 후에, 그래, 커밍아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했다. 무엇보다 그 뉴스를 보고 애들이 던질 동성애혐오 막말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전에 내가 선수쳐야 했다. 그런데 막상 하려고 보니, 일주일이 길어 보였다. 커밍아웃 하고 나서 샤워장에서 마주칠 그들과의 불편함이 먼저 떠올랐다. 이제 생활관에서 팬티까지 까고 로션 바르는 일은 못하겠지. 나를 의식하게 되고 내가 그들을 의식하게 되는 게 싫었다. 그들은 조금 불편해져도 되지만 (그건 너희들의 편견이니까), 내가 불편해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로 미뤘다. 자기 전 어둠 속에서 커밍아웃했다. 어둠은 좋다. 내가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의 얼굴에 비칠지 모르는 혐오의 표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당당하고 싶지만 불쌍해 보일지 모르는 나를 감출 수 있으니까.

"나 할 말 있어. 나 게이야."

"이건 뭐지? 무슨 개드립이야?"

"나 진심인데."

"근데 저게 사실이면 대반전."

"나 진짜 진심이야."

"이제 와서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나 진짜로 게이 본 적 있는데."

"내가 그 게이라니까."

"아니, 남자끼리 키스하는 거 직접 본 적 있는데 더러워 토할 뻔했어."

"형, 그러지마. 남자 좋아하지 말고 여자 좋아해."

침묵.

대략 이 정도의 말이 오가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고 잠들었다. 나도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군대에서 나를 알고 지냈던 이들의 귀에 "야! OO이 게이였데." 라는 가십이 들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 혹은 욕을 할 때, 잠깐이나마 내가 생각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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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Don't ask Don't tell' 규정이 폐지되고 공개적으로 LGB(T)인 사람도 군복무가 가능하게 된 뒤 사진가들이 찍은 캠페인 사진들(트랜스 젠더는 아직 불가능함). 거울의 양쪽에 LBGT의 모습과 군인의 모습이 각각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들 보러 가기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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