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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길

갤브레이스가 민주주의를 "상쇄력의 제도화"로 정의했을 때 그는 "자본(이 우위를 점하는 위계적 권력현장인 시장)에 대한 노동의 상쇄력을 시장안팎에서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는 체제"를 넌지시 가리킨 것이다. 가령 정치마저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들지 못하고 가장 큰 생산자집단인 노동을 배제한다면, 정치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진보정치의 본령은 약자의 목소리가 수렴, 표출되는 제도적 장치, 곧 계급간 권력적 길항의 제도화를 마련하는 데 있다.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시장안팎에서 소외된 노동이 늘어나는 작금의 상황은 진보정치의 회생을 위한 호기여야 한다.

ⓒsyntika via Getty Images

"가방 속엔 고양이가 없었고, 모자 안엔 토끼가 없었으며, 머릿속에는 뇌(腦)가 없었다." 대공황의 혹독한 여진 속에서 치러진 '세계경제대회'가 무기한 정회에 들어갔을 때, 케인스가 성과 없이 끝난 그 요란한 회의를 비난하며 했던 말이다.

뻔한 흠집 내기는 그렇다 치고, 대권주자들의 입에서 더 할 수 없이 듣기 좋고 풍요로운 말들이 연일 쏟아진다. 그러나 상투적이고 언듯 반듯해 보이는 말들은 현장의 실천성과 유리된 채 부유하고, 대안을 위한 말들의 공방은 종종 풍성한 말잔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현실정치는 가치와 정책을 둘러싼 엄정한 선택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평론가 황현산은 영화 「시」를 감상한 한 칼럼에서 시작법에 관한 강의가 막상 시 입문자의 시 쓰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맥락을 전하며 "가장 신실한 말이 가장 허망한 말"이 될 수 있다 했거니와, 그의 날선 지적이 오늘 더 각별하다.

여론전에 매몰된 대선정국

촛불과 특검과 헌법재판소는 걷잡을 수 없이 빗나갔던 한국정치를 간신히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 그 '본전치기'조차 얼마나 노심초사의 힘든 여정인지를 뼈저리게 보여주었다. 각자의 속셈이야 어떠하든, 그 홍역을 치르고도 청산돼야 마땅할 인물들마저 대선정국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정치가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점에 와있음을 실감한다.

정책이 여론보다 선행해야 순서일 터인데, 여론의 바람-돌풍과 뒤집기 따위-이 정당과 후보자의 행태를 규정하는 기이한 전도(顚倒)가 거듭되는 와중에,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버터 한 조각을 터무니없이 큰 빵에 무작정 얇게 펼쳐 바르는 셈이랄까, 언론의 습관적 조명을 받는 대선주자들은 여론전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실체보다는 소극적이며 잡다한 외연을 넓히는 일에 사력을 다한다.

부동층이나 중범위 유권자의 포섭도 먼저 가치와 기준을 공들여 정립한 이후에 좌우로 정밀하게 움직이는 전략적 선택의 결과여야 할 것이다. 진영의 내용은 비었는데 진영논리만 있으니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은 어디에도 없고 사안에 따른 느닷없는 중구난방과 막무가내의 치고받기만 요란하다.

비민주적 선거제도나 거기 맞물린 후진적 정당체제 같은 절박한 제도적 사안은 아예 뒷전인 채, 죄 없는 정부형태를 두고 한국정치의 사활이 걸린 양 한바탕 소동을 피우더니 지금은 그마저도 잠잠하다. 정치적 역정과 정책역량에 대해 변변히 검증할 새도 없이 색깔론 혹은 지역감정을 은근히 선동하거나 비민주적 정당조직에 간신히 얹혀 마침내 대선후보를 꿰찼으니 대선정국의 혼란스런 이모저모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제도화

"예수께서 우셨다."(Jesus wept.) 나사로라는 청년의 죽음 앞에서 예수가 보인 모습이다. 이 두 단어가 전부인 요한복음 11장 35절은, 3만여 개의 절(節)로 이루어졌다는 성경의 가장 짧은, 그리하여 그만큼 강렬한 절이다. 영국 신학자/설교가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는 예수의 울음에는 거대한 가해세력을 향한 분노와 희생자에 대한 연민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박근혜정권의 비극은 분노와 연민의 대상을 완전히 뒤바꿨다는 데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인간은 "이해관계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라 했다. 인식능력도 불완전할 뿐 아니라 스스로 윤리적 삶을 살아내기가 버거운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인간 공동체가 민주주의란 것을 만들어 피차 견제케 하고 그때그때 타협을 통해 가해와 피해가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그나마 경계해 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경제학자, 1908~2006)가 민주주의를 "상쇄력의 제도화"로 정의했을 때 그는 "자본(이 우위를 점하는 위계적 권력현장인 시장)에 대한 노동의 상쇄력을 시장안팎에서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는 체제"를 넌지시 가리킨 것이다. 가령 정치마저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들지 못하고 가장 큰 생산자집단인 노동을 배제한다면, 정치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그 법석을 치르고도 한국정치는 기껏 적폐에 편승하거나 도무지 그 차이가 요령부득인 '주요' 대권후보들 사이의 지루한 각축으로 영일이 없다. 이 혼돈 속에서, 선거법, 정당체제, 언론관계법, 노조관련법, 비정규법, 기업법 등 허다한 분야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절차'는 여전히 불완전하며 아슬아슬하다.

진보정치의 본령은 약자의 목소리가 수렴, 표출되는 제도적 장치, 곧 계급간 권력적 길항의 제도화를 마련하는 데 있다.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시장안팎에서 소외된 노동이 늘어나는 작금의 상황은 진보정치의 회생을 위한 호기여야 한다. 당장의 곤궁을 면하기 위해 실용적·공학적 접근에 매일 때, 진보정당은 항구적으로 선거에 취약한 과잉의(redundant) 정당으로 남기 쉽다. 그 도정은 험난할지언정, 진보가 가야할 길 자체가 복잡한 것은 아닐 것이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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