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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대한 '그'의 다짜고짜 반말이 불편한 이유

영화를 보면서 "왜 저 남자는 처음 만난 여자에게 반말을 하며 으스대지? 왜 저 여자는 별로 나이가 많지도 않은 저 남자를 아저씨라고 부르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게 문제가 된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텔레비전만 틀어도 툭하면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반말을 해대는 무례한 남자들과 그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맥 빠진 여자들이 부글거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상이 되는 건 아니다. 비정상인 언어가 많을 뿐이다.

  • 듀나
  • 입력 2017.04.11 07:20
ⓒ언니네홍보사

이윤기의 신작 〈어느날〉에서 가장 신경 쓰이고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속에서 김남길이 연기하는 보험회사 직원 강수가, 그의 눈에만 보이는 교통사고 환자 미소의 영혼에게 자꾸 일방적으로 반말을 한다는 것이다. 존엄사, 모녀 관계, 배우자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인데, 끈적거리며 남는 건 김남길이 하는 반말이다. 하긴 다른 주제들은 얼마든지 대체 영화를 찾을 수 있다. 남자의 눈에만 보이는 여자의 영혼이란 설정은 이미 〈저스트 라이크 헤븐〉에서 다루었다. 어린 시절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모녀 관계 같은 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행복 목욕탕〉에서 더 깊이 다루고 있으니 그 영화를 갖고 이야기하면 되고.

영화를 보면서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일단 미소가 보기보다 한참 어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그래도 미소를 연기한 천우희는 아주 최근까지 교복 연기를 했던 배우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미소의 극중 나이는 25살이다. 강수가 30대 중후반이라면 띠동갑 정도 될 텐데, 아무리 띠동갑이라도 처음 만난 성인여성에게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반말을 하는 게 정상적인 상황인가? 심지어 강수는 중간에 미소가 가볍게 말을 놓자, "어, 반말인데?" 하고 그 시도를 차단해버린다.

강수가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반말을 하는 불쾌한 남자라는 게 캐릭터 설정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그는 매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차가운 남자일 수 있다. 하지만 반말 설정은 그것과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격식을 차린 존대가 더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 그리고 미소와 강수의 관계는 그런 것과 상관이 없다. 무엇보다 강수는 관객들의 동정을 얻고 공감을 구해야 하는 인물이다. 그걸 차단하는 모든 시도는 제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왜 저 남자는 처음 만난 여자에게 반말을 하며 으스대지? 왜 저 여자는 별로 나이가 많지도 않은 저 남자를 아저씨라고 부르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게 문제가 된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텔레비전만 틀어도 툭하면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반말을 해대는 무례한 남자들과 그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맥 빠진 여자들이 부글거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상이 되는 건 아니다. 비정상인 언어가 많을 뿐이다.

최근엔 이 비정상이 도를 넘는 것 같아 내 텔레비전 생활이 무척 괴롭다. 아무리 선배이고 강등되었다고 해도 여성 상관을 '너'라고 부르며 으르렁거리는 〈보이스〉의 장혁을 간신히 견뎌내고 나니, 이제 민간인 프로파일러 대학교수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반말을 해대는 〈터널〉의 최진혁이 기다리고 있다.(80년대에서 시간여행 했다는 게 알리바이는 안 된다. 당시에도 대학교수는 대학교수였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반말을 하는 건 〈시카고 타자기〉의 유아인도 만만치 않다. 이 정도면 거의 작가들과 시청자들이 집단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린 게 아닌가 싶다.

언어폭력은 그냥 언어폭력일 뿐이고, 무례함은 그냥 무례함일 뿐이다. 이건 어느 기준으로 봐도 불쾌해야 정상이다. 이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곧 현실세계의 언어폭력과 무례함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우린 이미 그 결과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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