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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의 가난한 여행자

285유로, 한국 돈으로 35만 원가량 되는 현금을 가지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8일간의 유럽 여행이 그렇게 막을 올렸다.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에게는 두 가지 생존 전략이 있었다. 첫째는 최대한 돈을 아끼는 것. 그래서 무료로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내가 즐겨 이용한 사이트는 소파를 찾아다닌다는 뜻의 '카우치서핑'으로, 현지인들이 집을 열어주고, 여행자들이 며칠 밤을 묵어가는 플랫폼이었다.

2015년. 새해가 밝았다. 서른세 번, 어김없이 보신각에서 종이 울렸지만 들려오는 이야기는 더없이 암울했다. 헬조선, 인구론, N포세대, 금수저, 그리고 흙수저. 친구들을 보니 다들 학교에 학원에, 숨 돌릴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 고단한 인생길을 걷고 있었다. 혹여 경쟁에서 도태되진 않을까, 루저가 되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었다. 사회 전체로 시선을 넓혀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을 타도 버스를 타도, 어디에 가도 누구를 만나도 그 얼굴에서 힘들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사회에 희망이 사라진 가운데, 나 자신의 미래도 쉽사리 내다볼 수 없었다.

이제 열여덟, 곧 있으면 스물. 나이를 먹어감에 있어 짜릿함 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몸담아왔던 부모님의 그늘 아래서 독립한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는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독립이 모두 포함될 터. '과연 나는 2년 내에 부모님으로부터 이 세 가지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을 때 선뜻 '그렇다'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앞길은 막연하고 또 막막했다.

어디론가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괴롭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우리는 더 열심히 공부하는데 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더 치열하게 노력하는데 왜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더 열심히 일하는데 왜 더 가난해지기만 할까? 과연 누구를 탓해야 한단 말인가? '다 누구 때문이야'라며 한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까? 그것이 1인칭의 '나'이든, 2인칭의 '너'이든, 3인칭의 '그'이든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을 택했다. 사회안전망을 잘 갖추고 있는 나라들이기에. 지금 그들의 모습 속에서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찾고 싶었다.

285유로, 한국 돈으로 35만 원가량 되는 현금을 가지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8일간의 유럽 여행이 그렇게 막을 올렸다.

황홀하고 때로는 쓰라린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에게는 두 가지 생존 전략이 있었다. 첫째는 최대한 돈을 아끼는 것. 그래서 무료로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내가 즐겨 이용한 사이트는 소파를 찾아다닌다는 뜻의 '카우치서핑'으로, 현지인들이 집을 열어주고, 여행자들이 며칠 밤을 묵어가는 플랫폼이었다. 원래는 만18세 미만이 가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나는 일단 가입을 한 다음 정성 들여 메시지를 적었다. '저는 아직 열여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러이러한 이유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사흘 밤만 머물 수 있을까요? 부탁이에요!'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Yes!'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대부분 숙소를 카우치서핑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루는 친절한 셰프 아저씨의 집에 머물며 진수성찬을 맛본 적도 있었고, 까칠한 호스트를 만나 눈치를 보며 지낸 적도 있었다. 넓고 푹신한 침대를 만끽한 적도 있었고, 차가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잠을 청한 적도 있었다. 호강도 많이 했고, 고생도 수없이 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은, 그 와중에 아주 이상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는 것, 노숙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장의 무기는 바로 바이올린이었다. 생존 수단으로써 바이올린. 나의 첫 길거리 연주는 파리 3구의 어느 좁은 골목길이었다. 나는 조그만 벤치에 앉아 자그마치 한 시간을 망설였다. 쓸쓸하고 또 무섭기도 했다. 그 짧은 찰나에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봐야 했던 수많은 거지들을 떠올렸다. '거지는 과연 창피함을 느낄까. 처음엔 그랬을 수도 있지. 그러나 지금은 무뎌진 것일 거야. 그래, 나도 무뎌지면 되는 거다.' 케이스를 발 앞에 내려놓고 음정을 맞춘 다음 드디어 연주를 시작했다.

첫 곡은 바흐의 파르티타 2번이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맨 마지막의 샤콘Ciaccona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나는 샤콘을 배우지 못했다. 알르망드Allemanda를 끝내고 쿠랑트Corrente의 중간쯤 연주했을 무렵, 한 신사 분이 지나가며 1유로를 던져주셨다.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은 다 그분 덕분이다. 곡이 끝날 때까지 한 푼도 벌지 못했다면 지레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자리에 서서 한 시간도 넘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첫날의 수입은 33유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나는 여행 초반부터 꾸준히 글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 마침표는 찍지 못했다. 낮에는 도시를 둘러보며 거리 연주를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이 몇 주간 지속되자 체력이 바닥에 다다른 것이다. 글쓰기와 여행의 호흡을 도저히 맞출 수 없어 결국 하나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여행은 과연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짜릿한 흥분과 기대감, 설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기도 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생각지도 못한 경관을 접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사람을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이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다운 일이지만, 익숙지 않은 환경과 시시각각 돌변하는 상황에 매번 새롭고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곳은 또한 삶의 최전선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생존하고, 숙소를 찾고, 무엇을 먹을지 결정해야 했다. 매순간 선택해야 했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생겼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때로는 황홀하고 때로는 쓰라린 여행, 그리고 인생. 3개월 동안,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었을까.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에 실린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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