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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스토리] 8. 내 딸은 레즈비언이고, 물론 나는 '딸 바보'다

존재하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동성애를 신의 착오, 자연의 오류, 죄악, 음란, 타락이라고 혐오하고 차별한다. 이런 것은 존재를 외면하는 것이다. 실존을 외면하는 본질은 없다고 믿는다. 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닮은 것 같기도 한 딸의 존재는 내 삶의 축복이다. 나의 휴대폰 첫 화면에는 다른 '딸 바보' 아빠처럼 딸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힘든 삶의 여정에서 소중한 딸이 '존재'했기에 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딸의 여자 친구도 누군가의 소중하고 예쁜 딸일 테니 나는 그 둘의 인생이 무지개처럼 찬란하도록 축복하고 싶다.

ⓒfotografixx via Getty Images

성소수자 부모모임이 '커밍아웃 스토리'를 연재합니다. '커밍아웃 스토리'에는 성소수자 당사자와 성소수자를 자녀로 둔 부모들의 커밍아웃 관련 이야기들이 담깁니다. 당사자가 이야기하는 커밍아웃을 준비한 과정과 커밍아웃할 때의 감정, 그리고 그걸 받아들일 때 부모의 심정 변화와 상황들... 고민과 애환 그리고 감동이 가득한 우리들의 커밍아웃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커밍아웃 스토리' 연재의 다른 글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성소수자 부모모임 블로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의 딸 린이는 어릴 때부터 치마를 즐겨 입지 않았다. 인형 놀이를 한 기억은 별로 없고 대신 농구와 스케이트보드, 비디오게임, 레고를 좋아했다. 카키색 바지와 닥터마틴 부츠를 좋아했다. 중학교 때에는 치마를 억지로 입긴 했지만, 고등학교에 가서는 기어이 교복 바지만 입고 다녔다. 머리는 남학생들처럼 숏컷이었고 검정 뿔테 안경에 바지를 입고 심지어는 팔자걸음을 걸었다.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남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음식점의 여자 화장실을 가려고 할 때 종업원이 "애야~, 거긴 여자 화장실이야!"하고 제지하거나 옆 테이블에 앉은 다른 손님들이 딸아이의 외모를 보고 수군덕거리는 것을 듣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딸이 남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때는 아마도 딸의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같은 반의 어떤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그 여학생의 엄마가 아내에게 일종의 풍문과 사인을 보냈고 아빠인 나는 그냥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다. 흔히 고등학교 시절엔 남학생끼리 혹은 여학생끼리 세상에 둘도 없는 우정을 쌓아가는 시기가 아니었던가, 라고 말이다. 딸이 사춘기의 흔한 증상인 '남학생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후회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맞벌이 부모의 바쁜 일상 속에서 딸에게 세심한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딸은 자신만의 성적 지향을 확립하게 된 것 같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7년 1월호에 따르면 "성 정체성이 일반적으로 유아기 때 명확해지는 반면 매력을 느끼거나 사랑에 빠지는 대상과 관련 있는 성적 지향은 더 늦게 확립된다. 조사에 따르면 성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성적 지향 역시 바뀔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무식하게도 성적 지향은 바뀔 수 있다고 여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라고 근거 없는 믿음을 가졌다. 그 사이 딸은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으로 인한 걱정과 불안, 따돌림과 우울한 기운, 점심 급식시간에 혼밥을 오롯이 혼자서 감내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아리다.

운 좋게도 딸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였다.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에 새 출발을 하는 딸이 보통의, 평범한 대학생이 되기를 희망했다.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남자친구' 소식은 없었다. 자취를 하고 있던 딸에게서 들리는 소식은 활기찬 대학 생활과 새로운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였다. 멀리서 자취하니까 딸 가진 부모의 심정으로 '여자'를 좋아하고 '남자'에 관심 없으니 남자 때문에 속 썩을 일이 없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졸업을 한 학기만 남겨둔 방년 이십 육세의 아름다운 딸에게 사윗감이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예상은 대(代)가 끊기는 아픔이었다.

딸의 커밍아웃과 수용하기까지의 나의 마음

흔히, 암환자가 겪게 되는 심리 5단계가 있다고 한다. 1. 부정 2. 분노 3. 타협 4. 우울 5. 수용. 나도 딸이 암에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비슷한 과정을 겪은 것 같다. 나의 경우는 1단계 부정의 기간이 길었다. 나는 이성애자고, 아내도 그러하고, 부모 형제도 전부 다 이성애자임에 틀림없고, 주변에 동성애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첫 딸 린이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고 '이게 뭐지!'하면서 판단 보류 상태였고, 동성애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었고 딸과 내 자신에게 뭐라 해 줄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아닐 거야, 내 딸이 그럴 리가 없어'라고만 생각했었다. 딸의 입장에서는 4단계 우울 단계가 길었던 것 같다.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하여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서 이해와 존중과 그리고 지지를 얻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부정의 반대는 긍정, 존중이다. 긍정하고 존중하기까지가 큰 고비였던 것 같다. 큰 고비를 넘으니 수용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딸의 고1부터 대학졸업을 1학기 남겨둔 지금까지 근 10년 동안 딸의 변치 않았던 일관성에 의해, 서서히 딸의 성적 지향을 수용하는 단계까지 온 것 같다.

상대적으로 분노가 적었던 이유는 틈나는 대로 미국영화나 미국드라마를 가족끼리 즐겨보고, 다양한 주제로 터놓고 대화할 수 있었던 가족문화 덕분이었다. 미국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정형외과 의사 캘리와 소아과 의사 애리조나의 티격태격 사랑이야기가 이성커플과 다르지 않았고 드라마 속에서는 동성커플이 혐오의 대상, 혹은 차별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드라마에 빠져서 즐겁게 보니 이해되었고 동화되었고 자연스러웠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속담이 맞았다. 물론 미국드라마의 설정과 대한민국의 현실은 태평양의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있지만 나의 딸 린이도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요리하고, 먹고 마시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여행하면서 추억을 쌓고, 일하며 도전하고 성취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면서 깨가 쏟아지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당신 옆에 있는, 이제는 익숙한 성소수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수용의 단계까지 왔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의 딸 린이는 도대체 왜 가르쳐 준 적 없고 배운 적이 없는 레즈비언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라고 궁금해진다. 미주 한국일보 강진우 기자의 2017년 2월 10일자의 리포트에 따르면 "워싱턴DC 성인 인구 가운데 8.6% 가량이 성소수자(LGBT)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략) 사우스 다코다주가 2% 비율로 성인 LGBT 인구 비율이 가장 낮았다." 한국에서 관련 통계는 나온 적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성소수자 비율이 낮아도 2% 이상은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추론해 볼 수 있다. 100명 중에 2명. 이 2명은 왜 존재할까? 동서고금을 통틀어 동성애자가 없었던 적이 없다.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신라, 고려, 조선에서도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존재한다. "주변에 동성애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보고도 관심이 없어서 지나쳤을 뿐이다.

이제 우리 가족 중에는 무려 25%가 존재한다. 2%이건 25%이건 왜 존재할까? 존재하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동성애를 신의 착오, 자연의 오류, 죄악, 음란, 타락이라고 혐오하고 차별한다. 이런 것은 존재를 외면하는 것이다. 실존을 외면하는 본질은 없다고 믿는다. 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닮은 것 같기도 한 딸의 존재는 내 삶의 축복이다. 나의 휴대폰 첫 화면에는 다른 '딸 바보' 아빠처럼 딸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힘든 삶의 여정에서 소중한 딸이 '존재'했기에 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딸의 카톡메시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세상이 너무 험난해서 하루를 치어서 사는 동안에도 나에게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신 덕분에 저는 요즘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있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나의 삶을 자랑스러워하는 딸로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난 것이 무엇보다도 행운이야. 아마 다음 생, 그 어떤 거지같은 나라에서 태어나도 난 엄마 아빠의 딸로만 태어날 수 있으면 또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린이는 특별한 존재이고 재주가 많은 아이이며 예비 웹툰 작가이다. 딸의 여자 친구도 누군가의 소중하고 예쁜 딸일 테니 나는 그 둘의 인생이 무지개처럼 찬란하도록 축복하고 싶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를 껴안듯이, 오글거리지만 내 딸의 존재 이유는 이렇다 치고, 다른 2%의 동성애자의 존재 이유는? 음악을 사랑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이름 엘튼 존.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한 '이미테이션 게임'이란 영화로 많이 알려진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는 앨런 튜링. 당신이 지금 아이폰을 쓰고 있다면 잘 알 것 같은 애플의 현재 CEO인 팀 쿡.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재미있게 봤다면 기억할 엘런 페이지. 그 외 다수의 특별한 재능을 소유한 성소수자, 그들의 존재 이유는 우리 인류 모두에게 보다 많은 풍요로운 삶을 선사하려는 신의 아주 특별한 선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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