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10시 ‘법꾸라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되던 시각, 그로부터 100여 미터 떨어진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원조 법꾸라지’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 1992년 대선에서 지역감정 조장을 모의한 이른바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이듬해 4월 법정에 선 지 꼭 24년 만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 심리로 이날 열린 김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51)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57)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소영(51) 전 청와대 문체비서관의 첫 정식재판에선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통제와 이를 주도한 김 전 실장 등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첫 증인으로 나온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블랙리스트’가 박근혜 정부의 확고한 기조였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그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기 직전 대통령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말했다. (면담 전까지는) 김기춘 실장이 호가호위한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박 전 대통령은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전 실장을 겨냥해 “블랙리스트 주도범이라 생각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조 전 장관과 관련해서는 “장관 때는 블랙리스트 업무를 지시하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 전 김종덕 장관은 그런 강요를 해서 직원들이 싫어했다. 조 전 장관은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기춘 전 실장은 이날 재판에서 자신을 “여론재판과 정치적 표적 수사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박 전 대통령에게 미루는 모습을 보였다. 김 전 실장의 변호인은 “피고인은 인사권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의사와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거나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특검의 공소사실을 ‘악의적 선입관’이라고 단정했다. 김 전 실장도 직접 발언권을 얻어 “저는 노구를 이끌고 봉사를 하러 (청와대로) 들어갔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김 전 실장은 재판 중 꼿꼿한 자세로 방청석을 둘러보거나, 조 전 장관의 모두 진술을 칭찬하며 변호인과 대화를 하는 등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청와대 정무수석 재임 시절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조 전 장관은 구속 전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오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법정에서 “지금까지 저에 대한 깊은 오해가 쌓여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제가 겪은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밝히겠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해당 정책을 비판하는 장면도 연출됐다. 김소영(51) 전 청와대 문체비서관은 변호인을 통해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심지어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던 ‘지원하나 단속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 기조가 현저히 무너졌음을 보여준다”며 “청와대 비서실이 조직도대로 권한이 안배되고 행사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