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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못돼먹어도 괜찮다 | 영화 「히든 피겨스」 관람평

50년 후 우리의 딸과 아들이 기억할 여성은 누구일까? 우리 자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엄마, 할머니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 이기적이고 못된 여자라고 비난받는 여성은 안심해도 좋다. 옳게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안심하고 좀더 못돼먹게 굴어도 된다. 아이를 둔 엄마라면 남편에게 육아와 살림을 떠넘겨라. 명절에 뒹굴거리는 남자들을 위해 전을 부치지 말고 모두 부엌에서 나와 놀러 가라. 미혼여성에게 결혼의 미덕을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좀더 당당하게 너의 생각이 후졌다고 말하라. 무엇이든 당당하게 요구하라. 그러면 사회는 변할 수밖에 없다.

  • 이지유
  • 입력 2017.04.06 10:03
  • 수정 2018.04.07 14:12

한 컴퓨터가 소변을 보려고 800미터 떨어진 건물로 동동거리며 뛰어간다. 컴퓨터가 화장실을? 여기서 컴퓨터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전자계산기가 없던 시절 제곱근, 싸인, 코싸인 등 듣기만 해도 두통이 오는 계산을 오로지 손으로만 했던 여성들, 컴퓨터는 바로 그 여성들을 지칭하던 명사였다. 수학 천재였으나 '흑인이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사(NASA)의 컴퓨터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캐서린은 뛰어난 실력 덕분에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하는 핵심부서로 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그녀가 근무하는 건물에는 '유색인을 위한 여자화장실'이 없다. 소변 한번 보려면 왕복 1.6킬로미터를 뛰어야 한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대학에 다니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과학대학 24동 건물에는 모두 8개의 화장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단 두개만 여자화장실이었고 그나마 거기에는 남성용 소변기가 있었다. 그렇다. 24동에는 원래 여자화장실이 없었던 것이다. 대학을 설립한 사람들은 여자가 이공계대학에 들어와 공부하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가 감히 그런 공부를' 또는 '여자는 그런 공부를 할 머리가 없다'고 여겼고 모름지기 여자의 미덕은 '결혼해서 애 잘 낳고 밥 잘하고 남편 외조와 더불어 부모를 잘 모시면 이 생에서 할 일 다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성의 상아탑인 대학에서는 여성을 위한 사적인 공간을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게 겨우 3~40년 전 일이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야만적인 시절을 살았다.

'컴퓨터'들의 고군분투

영화에 등장하는 또 한명의 컴퓨터 도로시는 정말이지 뛰어난 리더다. 그녀는 나사가 들여온 IBM 계산기가 흑인여성 컴퓨터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을 직감하고 도서관에 가서 프로그래밍언어 포트란(FORTRAN)에 대한 책을 합리적(?) 방법으로 훔쳐온 뒤 독학한다. 그리고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컴퓨터들에게 포트란을 가르쳐 모두 IBM의 프로그래머로 만들었다.

그후 계산하는 여성을 지칭하던 컴퓨터라는 명사를 차지한 것은 기계다. 여성의 일은 어떤 것으로든 대체 가능하며 가치를 논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컴퓨터가 원래 사람을 가리키던 단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지만 여성 컴퓨터들은 프로그래머로 환생했다. 백인 남자들이 기계의 단자를 엉뚱한 곳에 연결하고는 계산이 안 된다고 징징대는 사이 도로시는 이 기계의 진정한 두뇌가 된 것이다.

뛰어난 공학자의 자질을 지녔으나 역시 컴퓨터였던 메리는 나사의 로켓 개발 팀원이 되기 위해 학위를 하나 더 따야 했으나 대학은 흑인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은 그런 일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니다, 너무 애쓰지 마라, 당신이 상처받는 것이 싫다며 가족에게만 헌신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메리는 입학허가를 받기 위해 법원에 청원을 하고 결국 야간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판결을 받는다.

50년이나 흘렀지만 지구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육아와 살림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 개인이 쓸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는 유한한데 현대사회는 여성에게 모든 것에 능할 것을 요구한다. 아이를 둔 일하는 여성의 경우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여자가 밖으로 나돌아 이렇게 되었다고 비난받는다. 여성이 재능을 발휘하며 즐겁게 일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면 자기밖에 모른다, 이기적이다, 여자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맹비난한다. 그런 여성을 두고 못된 여자라고 한다. 모두 헛소리다. 결혼과 출산은 선택의 영역이다.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며 육아가 모두 엄마의 몫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거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육아와 살림 스트레스 없이 마음껏 일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메리는 어떻게 그 난관을 넘어갔을까? 남편의 반대는 패스! 그리고 입학허가 청원에 판결을 내릴 판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판사님, 오늘 내린 판결 중에 어느 판결이 100년 뒤에 '최초'라고 기억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50년 후 우리의 딸과 아들이 기억할 여성은 누구일까? 우리 자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엄마, 할머니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 이기적이고 못된 여자라고 비난받는 여성은 안심해도 좋다. 옳게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안심하고 좀더 못돼먹게 굴어도 된다. 아이를 둔 엄마라면 남편에게 육아와 살림을 떠넘겨라. 명절에 뒹굴거리는 남자들을 위해 전을 부치지 말고 모두 부엌에서 나와 놀러 가라. 미혼여성에게 결혼의 미덕을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좀더 당당하게 너의 생각이 후졌다고 말하라. 무엇이든 당당하게 요구하라. 그러면 사회는 변할 수밖에 없다.

캐서린은 정확한 궤도 계산을 위해 펜타곤 회의에 들어가겠다고 수차례 요구한다. 그러나 그 회의는 여성의 입실을 허가하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요구한다. 캐서린의 직속상관이 묻는다.

"캐서린, 물러서지 않을 거지?"

캐서린이 대답한다.

"예,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결국 펜타곤 회의에 참석한다. 이 우주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 여성은 물러서지 않는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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