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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극장화 | 홍준표 후보의 '박근혜 용서'라는 정치적 도구

1)'용서의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2) 언제 (용서의 적절한 시기), 어떻게 (용서의 구체적 방식), 이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3) 가해자/잘못한 자의 뉘우침,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뉘우침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4) '용서자'가 용서를 하게 되는 경우, 용서자는 잘못된 일에 대한 '분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닌가 등과 같은 물음들이다.

  • 강남순
  • 입력 2017.04.03 07:52
  • 수정 2018.04.04 14:12
ⓒ뉴스1

1.

현실정치에서 그 자체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이득'이라는 치밀한 계산에 의하여 호명되곤 하는 개념들이 있다: 사랑 그리고 용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가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국가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태극기 부대의 '국가 사랑'의 행위들은 그 어떤 비판적 성찰도 거부하는 몰지성과 인식적/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차용된다. 사랑과 용서-이 두 개념은 인간의 삶에 참으로 중요한 개념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에 의하여 지독하게 남용됨으로서 그 의미가 퇴색되고 왜곡되곤 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 더 이상 그 개념들의 소중한 의미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의 알러지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개념들로 퇴락되어 버렸다.

2.

3월 31일 새벽,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마자, 한 대선주자에 의하여 '용서'가 주장되고 있다. 3월 31일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홍준표 경남지사는 후보 수락연설에서 "박근혜 구속은 이중처벌이라는 느낌이다. 이제 국민들도 박 전 대통령을 용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했다.

3.

홍준표 대선 후보의 이러한 발언은 현실정치 영역에서 '용서의 극장(theater of forgiveness)'이 설정되고, 용서가 단지 '정치적 도구'로만 사용되면서 용서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되고 남용되는 단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용서'라는 심오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생각하고서 '용서'를 호명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에 의하여서만 호명하였기 때문이다. 즉,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연결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은, 사실상 복잡한 해석의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뻔히 드러난다. 그런데, 정치영역에서 호명되곤 하는 '정치적 용서'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근원적인 물음들이 있다.

4.

'용서'가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상 용서에는 자기용서, 대인간 용서, 종교적 용서, 정치적 용서, 형이상학적 용서 등 참으로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용서담론에서 논쟁적 주제가 되는 것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다:

1)'용서의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2) 언제 (용서의 적절한 시기), 어떻게 (용서의 구체적 방식), 이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3) 가해자/잘못한 자의 뉘우침,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뉘우침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4) '용서자'가 용서를 하게 되는 경우, 용서자는 잘못된 일에 대한 '분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닌가 등과 같은 물음들이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논의에 모두가 동의하는 통일된 답이 없다. 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한 용서논의에서 분명한 것은, 모든 정황에 적용될 수 있는 '용서의 매뉴얼'이나 또는 '용서-일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일이 생겼을 경우, 매 경우마다 치열한 비판적 성찰과 분석을 통해서 '용서'가 호명되고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5.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가 자신의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박근혜-용서'를 거론하였다는 것, 이것은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갈망하며 이루어낸 '촛불혁명'의 의미를 너무나 가볍게 퇴색시키고, 그 '촛불혁명'의 자리에 자신의 '정치적 권력에의 욕망'을 대체시켰다. 나는 그가 '용서'에 대한 복합적인 논의들을 인식하고 고민하는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용서'의 정체가 무엇이며, 이 시점에 이러한 '용서'를 호명하는 행위가 무수한 주말들을 촛불시위를 하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의에의 갈망을 표출해 온 '국민'들에게 어떠한 사회정치적 함의를 지닐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조차 결여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심한 우려를 가지게 된다. '대선주자'라는 타이틀을 지닌 정치가에게서 '권력에의 욕망'만 번득일 뿐, 최소한의 비판적 성찰은 찾아볼 수조차 없는 그 '성찰의 부재'가 참으로 암담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러한 '성찰의 부재'는 '홍준표'라는 특정한 정치인에게만 제한된 양상이 아니라, 사실상 현재 한국 정치계의 인지상태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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