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장국영 14주기①] 꿈처럼 왔다가 거짓말처럼 떠난 장국영

4월 1일은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故장국영의 기일이다. 47세의 나이에 드라마 2편, 영화 62편 등의 작품을 남긴 채 갑작스럽게 떠난 배우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장국영은 1956년 9월 12일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의 의상을 제작한 재단사였는데, 풍류를 즐기는 ‘바람둥이’로 여성편력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어 본처와 둘째 부인이 한 집에 살기도 했다고. 장국영이 형들과 외할머니 집에서 자라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사랑이 절실할 시기에 지독한 외로움과 결핍을 느낀 그는 평생 사람들의 정과 관심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구김살 없이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모가 있었다. 이 외로운 소년을 마치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그녀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장국영과 살며 친부모 이상으로 살뜰하게 봐줬다. 이에 장국영은 평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유모를 꼽기도 했다. 세상을 가장 의미 있게 사는 법을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스타가 된 후 유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그가 우수한 성적으로 영국 리즈대 섬유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은 가업을 이어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뜻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를 속일 수 없는지, 만약 그가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인 장국영은 직접 무대의상을 만들어 입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촌스럽지 않은 모던한 패션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타고난 패션 센스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아버지의 지병으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홍콩으로 돌아온 장국영은 뜻하지 않게 변호사 사무실에 취업을 하게 되고, 어느 날 연예인이 되고 싶던 한 친구의 제안으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그 친구가 장국영에게 음악 콘테스트에 나가자고 제안을 했던 것. ‘친구 따라 강남 갔던’ 장국영만 혼자 본선에 진출해 RTV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데뷔의 기회를 얻게 됐다.

아주가창대회의 열기가 식자 장국영을 향한 관심은 차갑게 식어갔고,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도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뼈아픈 경험이 그를 악착같이 노력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그의 고운 외모를 눈여겨봤던 드라마 PD들과 영화감독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 본격적으로 연기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성공으로 그는 홍콩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랐다. 걸작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연지구’(1988)는 예술영화에서도 통하는 배우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커다란 성공 뒤에 슬픔도 따라오기 마련인데, 그를 가수 프레임에 가두고 연기력에 대한 평가절하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세계가 인정한 배우로 평가받았지만, 평생 중국어권 메이저 영화 시상식에서는 단 한 개의 남우주연상만 받는 데서 그쳤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장애물을 헤쳐 온 장국영은 혁신적인 스타였지만, 인간 장국영은 유리알처럼 약하고 투명한 영혼이었다. 수십 년간 쏟아진 사회적 편견에 맞서 도전했지만, 그의 내면은 상처와 갈등으로 내내 신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느낀 그는 2003년 4월 1일 자살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이 날은 만우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벤트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들이 여전히 그를 잊지 않고 추모하고 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문화 #영화 #장국영 #배우 #만우절 #사망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