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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장애인을 몇 번이나 보나요?

동네 학원에 소소한 취미활동을 배우러 다닐 때도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갈 때도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갈 때마저도 시각장애인이란 존재는 유일한 1인이거나 상대의 인생 첫 경험으로 작용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통계상의 25만여명 시각장애인 숫자를 감안하면 정상적인 분포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통합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시절 만들어진 특수학교들에는 아직도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집약적 서비스라는 어쩔 수 없는 장점과 함께 교육을 받고 있다. 수천명이 함께 하는 초중고 교육을 받으면서도 장애인 친구 한두 명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 안승준
  • 입력 2017.03.31 09:47
  • 수정 2018.04.01 14:12
ⓒA-Digit via Getty Images

요즘 성당에서 하는 신자 교리교육을 다니고 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낯선 공기들로 가득찬 곳은 언제나 내게 어색함과 불편함 그리고 약간의 긴장이 동반된 불안함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긴 시간이 지나기 전에 편안함을 동반한 손을 내밀어 주는 천사가 나타나는 것도 특별한, 어김 없는 익숙한 사건이라는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내게 첫 마디를 걸어주신 분은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신 수녀님이셨다.

칠판의 판서들을 낭독해 주시고 간식을 나눠주시고 주변분들과의 인사까지 주선해 주시는 동안 나는 빠른 속도로 평정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부끄러운 약점마저 공유하시면서 나의 안정을 도모하시던 수녀님은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집에만 있으시면 많이 힘드시죠? 나도 병원에 오래 있어봐서 어느 정도는 알아요."라고 속삭이셨다.

그녀는 나의 상태 그리고 삶의 모양까지 뭔가 크게 확신에 찬 오해를 한 상태인 것 같았다.

나의 직업 나의 주거형태 등을 이야기 했을 때 까무러치게 놀라며 미안해 하시던 그녀의 반응으로 추측하건데 그 순간 그녀 안에 자리 잡았던 장애인과 관련한 개념들은 매우 큰 혼란과 변화를 거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동네에 보통 하나씩밖에 없는 성당에는 주일마다 수천명의 신자들이 드나든다.

장애인의 출현율을 10%라고 보면 매주 수백명의 장애인들도 그 안에 함께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내가 수백명의 장애인들을 한 성당에서 만난 것은 특수사목을 담당하는 장애인 성당에서 말고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같다.

장애인들이 특별히 가톨릭을 혐오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보면 다른 종교의 공간에서도 이런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로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생활하시는 수녀님이 시각장애인을 여럿 만나보지 못했으리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수에게 가장 관대하다는 종교마저도 이런데 전 국가 혹은 전 국민의 바른 인식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성급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생활들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가는 곳에서는 난 언제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동네 학원에 소소한 취미활동을 배우러 다닐 때도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갈 때도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갈 때마저도 시각장애인이란 존재는 유일한 1인이거나 상대의 인생 첫 경험으로 작용할 때가 적지 않다.

설명하기도 번거롭고 매번 불편함들을 감수해야 하긴 하지만 사실 그 이상의 과대평가와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도 조금의 장점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어쨌든 통계상의 25만여명 시각장애인 숫자를 감안하면 정상적인 분포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반대로 내 주변에 존재하는 시각장애인의 숫자를 계산하면 나의 총 만남 횟수 혹은 인간관계에 비례해 볼 때 너무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끼리끼리 논다고도 하고 비슷한 요구와 정보들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에도 너무도 많다.

통합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시절 만들어진 특수학교들에는 아직도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집약적 서비스라는 어쩔 수 없는 장점과 함께 교육을 받고 있다.

수천명이 함께 하는 초중고 교육을 받으면서도 장애인 친구 한두 명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특수학교에는 전공과라는 대학수준의 교육기관도 존재하는데 몇몇은 스무살이 넘도록 특수학교의 담장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학 혹은 그 이상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장애인 친구와의 만남을 경험하는 것은 여전히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장애인의 취업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낮기도 하지만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장애인 관련 단체나 회사에 종사하기 때문에 사회생활에서마저도 자연스런 장애인과의 만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가도 취미도 교양도 커다란 장애인 복지관에 전용시설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장애인들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교육정책도 복지정책도 사회의 디자인도 장애인들을 한 쪽으로 모아서 관리하려 하는 것만 같다.

국가의 경제가 넉넉하지 않았을 때에는 다소나마 이해해 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OECD니 선진국이니 무슨무슨 민주화니 떠들 수 있는 요즘은 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닐까?

수녀님도 함께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4번 정도의 교육이 지나가면서 나를 향한 시선들을 신기함에서 익숙함으로 바꾸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강력히 확신한다.

성당이 그러했듯 우리 주변은 아직 장애인을 어색하지 않게 맞이할 준비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천사가 나타나지 않아도 어디를 가든 어색함과 불안함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애인들이 여가를 위해 도시로 이사가고 멀리 떨어진 큰 복지관을 찾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동네에서도 하루에 몇 번쯤은 장애인들과 마주치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한 쪽으로 억지로 몰아세우지 말고 골고루 퍼지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맞이의 준비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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