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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선'이라는 악

나는 한국인의 기본적인 도덕성이 바로 이러한 '약한 악'의 차원에 있다고 보는데, 정말 놀라운 점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약함'을 '선함'과 일치시켜 왔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몽골, 일본과 미국 제국주의를 '강한 악'으로 설정하고, 자신들을 '약한 선'으로 치환한 것이야말로 한국인들의 가장 창조적인 업적이라고까지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인이 '약한 종족'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적으로 '선한 종족'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역사는 '약함'이 빈번하게 '악함'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야말로 근대 한국인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자기 기만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최범
  • 입력 2017.03.29 07:58
  • 수정 2018.03.30 14:12
ⓒYuriko Nakao / Reuters

'강/약'과 '선/악'은 다른 범주이다. 전자는 물리적인 개념이고 후자는 윤리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주 상호결합한다. '강'이 '선' 또는 '악'과 결합하기도 하고, '약'이 '선' 또는 '악'과 결합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강한 선'이나 '강한 악'이 생기기도 하고, '약한 선'이나 '약한 악'이 생기기도 한다.

'강한 선'이 예컨대 붓다나 예수에게서 보듯이 강력한 종교적, 도덕적 신념에 따른 희생적 실천 같은 것이라면, '강한 악'은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막강한 권력이 휘두르는 절대악 같은 것이 아닐까. 그에 반해 '약한 선'이 정직하고 소박한 삶이 빚어내는 잔잔한 도덕이라면, '약한 악'은 세속과 권력에 짖눌리면서도 거기에 빌붙는 찌질이의 삶일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악마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약하고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이며, 바로 그러한 무능력한 존재로서 우리의 도움과 기도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런 '약한 악마성'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카프카의 소설세계이다. 악마는 무서운 힘을 갖고 인간을 파괴시키는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진부한 '스놉'이라는 형상 속에 구현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악마, 즉 스놉은 욕망의 발신자 즉 유혹자가 아니라 욕망의 수신자 즉 유혹에 걸려드는 자이다. 조직의 명령과 타자의 시선, 그리고 평판에 두려워 떠는 자이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88쪽)

이 인용문에서처럼 악마가 강한 존재가 아니라 약한 존재이며, 유혹하는 자가 아니라 유혹 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너무도 시사적이다. 나는 도덕의 역사에서 '강한 악'이 아니라 '약한 악'의 발견이 참으로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인간을 파괴하는 괴물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에 휘둘리며 비굴하게 사는 자들도 얼마든지 악마일 수 있다는 폭로처럼 무서운 진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잘먹고 잘살겠다는 개인적 욕망이 어떻게 사회적 악으로 결과되고 박근혜 같은 괴물을 낳았는지를 우리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지 않은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나는 한국인의 기본적인 도덕성이 바로 이러한 '약한 악'의 차원에 있다고 보는데, 정말 놀라운 점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약함'을 '선함'과 일치시켜 왔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몽골, 일본과 미국 제국주의를 '강한 악'으로 설정하고, 자신들을 '약한 선'으로 치환한 것이야말로 한국인들의 가장 창조적인 업적이라고까지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는 가히 집단적인 기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약함'과 '선함'을 일치시키고 '강함'과 '악함'을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고정될 수 없는 인지적 오류이다. 한국인이 '약한 종족'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적으로 '선한 종족'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역사는 '약함'이 빈번하게 '악함'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약함'이 곧 '선'임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인만큼, 나는 한국인들이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위장막부터 걷어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야말로 근대 한국인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자기 기만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 소녀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처럼, 일본을 '강한 악'으로 설정하고, 그에 비례하여 자신을 '약한 선'으로 주조해내는 한국 민족주의의 종교적 메카니즘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철학자는 니체라고 본다. 니체는 감히 '강한 것이 선'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니체에게 '약한 것은 악'이다. 삶에 패배해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니체는 채찍질을 한다. 자신의 '약함'을 동정하지 말라고. 물론 이러한 니체의 사상이 얼마든지 파시즘적인 힘의 숭배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강한 악'으로 귀결될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강함'을 '선'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아니면 '악'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도덕적 의지에 달린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약한 선함'이라는 집단적인 망상에서 벗어나서 '강한 선함'을 추구하는 만큼 헬조선의 '찌질한 작은 악마들의 세계'를 극복하고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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