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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에서 여전히 기억해야 하는 사실 5가지

세월호가 지난 3월 23일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1073일만이다. 인양 작업 중이던 3월 22일에는 원주에서 노란 리본 모양의 권운이 발견돼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이 달았고, 아직도 달고 있는 '노란 리본'의 의미는 '잊지 않겠습니다.'이다. 그런데 이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과연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 안타까운 사정에만 국한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기엔 그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숱한 이들의 잘못, 그 잘못에 대한 책임까지 기억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여전히 똑바로 묻지 못해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누군가의 잘못과 책임. 그래서 더욱 기억해야 하는 '세월호 침몰 당시'를 둘러싼 사실 5가지를 책을 통해 간추려 정리해보았다. 아직 우리는, 잊지 않았다.

*모든 인용문, 사실관계는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에서 발췌 및 참조

1. 선원

세월호는 08시 49분 처음 좌현으로 기울어졌다. 조타실에는 3등 항해사 박한결과 조타수 조준기가 있었다. 좌현으로 배가 기울어졌을 때 선장 이준석이 처음 안내데스크 선원들에게 내린 승객들에 대한 지시는 '선내 대기하라'였다. 안내데스크에 있던 여객부 선원 강혜성은 그 지시를 받아 08:52분 처음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한다. 조타실에선 안내데스크 방송을 직접 들을 수 없었지만 옆 외부 갑판에서 흘러나오는 선내 방송을 들을 수 있었고, 1등 항해사 강원식은 '선내 대기하라'는 방송을 조타실에서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조타실에 모인 갑판부 선원들과 선장 이준석은 승객들에 대해 이후 후속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여객부 선원 박지영 씨가 조타실에 여러 차례 무전을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09:04분, 세월호 근처에 있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가 진도VTS를 통해 구조 협조 요청을 받았다. 둘라에이스호 선장 문예식은 자신의 배가 길이 105미터, 폭 15미터로 세월호 승객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판단, 09:22분에 세월호, 진도VTS와 교신을 통해 '탈출을 시키십시오, 빨리!'라는 의견을 전한다. 하지만 선장 이준석과 조타실에 모인 갑판부 선원들은 09:45분 해경 123정에 의해 구조되기까지 선내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한편, 여객부 선원 강혜성 또한 최승필 씨를 포함한 승객들이 "배가 많이 기울었으니까 지금이라도 구명보트 내리고 승객들을 탈출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방송을 해라"며 재촉했지만 안내 방송 내용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엔진컨트롤룸에서 근무하던 기관장 박기호를 비롯한 기관실 선원들은 운항관리규정에 의거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선 구명 뗏목과 구명슈터(미끄럼틀)를 바다에 내릴 의무가 있었으나 3층 기관실 객실 복도에 모여 가만히 앉아있다 구조받았다. 기관장 박기호는 1등 기관사 손지태, 3등 기관사 이수진과 함께 캔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2. 청해진해운

청해진해운은 세월호에 승객 443명, 선원 33명, 화물 2142톤, 승용차 124대, 화물차 57대, 중장비 4대, 컨테이너 145개를 실었다. 화물량만으로도 운항관리규정에서 정한 최대 화물 적재량 1077톤을 배 이상 초과했다. 3등 항해사 박한결은 출항 후 통신으로 인천VTS 전정윤을 호출, 인원 수와 화물 적재량을 알려주었다. 모두 엉터리였다. 운항관리실 선박운항관리자였던 전정윤이 모든 걸 직접 확인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관행'은 원칙과 달랐다.

08:49분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울고 2분 뒤인 09:01분, 여객부 선원 강혜성이 청해진해운 해무팀 대리 홍영기에게 '배가 기울었다'는 전화를 한다. 홍영기는 이후 세월호 조타실 선원들과 전화 연결했으나 별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청해진해운 인천본사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TV만 지켜보고 있었다. 선내 승객들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거래처 전화 문의에 응대했다. 09:21분, 청해진해운 제주지역본부 박기훈과 물류팀 과장 김정수는 화물량이 지나치게 많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물류팀장 남호만과 물류팀 과장 김정수는 그래서 우련통운에 연락해 세월호에 실린 화물량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09:30분이었다.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운지 41분이 지났을 때였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3. 해경

-진도 VTS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운 08:49분, 진도VTS 관제실에는 관제사 8명 등 총 10명의 직원이 있었다. 아무도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했다. 9시 4분 목포해경 상황실이 경비전화로 "세월호가 침몰 중"이라고 알려줄 때까지 15분간이었다. 관제실은 4명이 한팀으로 24시간 일하고 48시간 일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그들은 CCTV를 창가 쪽으로 돌려놓고 교신일지를 허위로 적으며 밤에는 1명이 모든 관제 업무를 보고 나머지 3명은 쉬는 변칙 근무를 '관행적으로' 하고 있었다. 2014년 4월 당시 그들은 초과근무수당을 94-140만원 수령했다. 8시 49분 진도VTS가 사고 사실을 인지했다면 구조 세력 출동 등 초기 대응 시각을 5분 앞당길 수 있었다. 사고 당시 관제대상 선박은 18척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대형 해상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주요 추적 관찰 대상인 여객선과 위험화물운반선은 4척뿐이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123정

123정은 사고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세월호와 단 한 차례도 교신하지 않았다. 현장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123정이 보낸 구명보트는 세월호 좌현 갑판 가까이 배를 붙였다. 123정 경사 이형래가 3층 로비 갑판으로 올라갔다. 로비와 연결된 출입문이 있었고, 열려 있었다. 안에는 방송 장비가 있는 안내데스크와 25명의 승객이 있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123정은 09:45분 조타실 선원들을 구조했다. 123정에는 방송장비가 있었다. 조타실에도 안내방송 장비가 있었다. 선원과 123정 해경 둘 다 퇴선 방송을 하지 않았다. 09:59분,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이 뒤늦게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고함치거나 마이크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나"라는 지시를 123정에 전달한다.

하지만 123정은 세월호 선수와 50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해경 중 누구도 선내 진입하지 않았다. 10:13분, 선미 출입문에 있다 123정 해경의 "한두 명씩 나와라!"는 소리에 나와 구명보트에 탄 장00 학생은 왜 해경들이 "충분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들어오질 않는"지 의아해했다. 4층 좌현 갑판에 물이 덮치기 직전 바다에 뛰어내려 허우적대던 구00 학생은 십자인대가 파열된 상태로 123정 구명보트에 끌어올려졌는데, 해경으로부터 "존나 늦게 올라오네, 씨발. 이 새끼 존나 무거워"라는 폭언을 들었다. 김00 학생은 바다에 다시 빠지는 게 무서워 노란색 펜더가 달린 로프를 몸에 감았다 해경으로부터 "그거 빨리 놔라, 개새끼야"라는 폭언을 들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목포해경, 서해해경, 해경본청

09시 04분 여객부 선원 강혜성은 목포해경 상황실에 전화했다. 받은 사람은 문명일이었다. 강혜성은 자신이 "선내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안내방송 중"이란 사실을 알렸다. 문명일은 "예예, 그렇게 해주세요, 예예"라고 얘기했다.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은 인명 구조 경험이 있는 자로서 현장 지휘를 고민했으나 통신 장비가 있는 3009함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감사원은 김문홍이 09:59분까지 3009함에서 아무런 지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서해해경 상황실은 9시 18분에서 23분 사이 진도VTS와 세월호가 서로 교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에 구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또 서해해경 상황실은 9시 28분 헬기 511호로부터 배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다. 퇴선 방송 등의 구조 지시는 내려지지 않았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해경본청 상황실 김남진은 09:36분 123정 정장 김경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경비과장 여인태는 통화를 바꿔 자세하게 보고를 받았지만 "계속 실시간으로 보고하라"는 지시 외, 구조에 대한 지휘는 하지 않았다. 해경본청장 김석균은 09:33분에도 "아직 명확한 사고 전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은 사고 현장 지휘가 아닌 청와대 보고라고 주장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09:59분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이 처음 퇴선 명령을 내렸으나, 너무 늦은 뒤였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4. 청와대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는 09시 19분 YTN 보도를 통해 처음 사고를 인지했다. 그때까지 해경 본청 상황실은 세월호 사고를 외부로 전파하지도, 보고하지도 않았다. 그 뒤 2-3분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청와대-해경청 핫라인(직통전화)을 연결해 영상과 구조 인원수 보고를 요구했다. 모든 요구는 123정에 그대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123정에 영상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엔 핸드폰을 통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제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23정은 순전히 보고하기 위해 구조 업무에 더해 사진을 찍고 사람 수를 세었다. 구조 인원 수와 구조된 인원을 옮기는 장소를 실시간으로 보고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지시는 모두 지휘용이 아닌 대통령 보고용이었다. 그리고 10시 25분, 세월호가 침몰하기 5분 전, 123정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진다. "단 한 명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5분 후 세월호는 침몰했다. 청와대는 오후 3:30분에야 첫 회의를 연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오후 05:15분에야 중대본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는 상황파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질문을 한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5. 퇴선명령자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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