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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서울시에서 지하철을 타면 곳곳에 어르신들이 나오셔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시곤 하신다. 그런데 현실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운 장면만으로 결론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이용하는 지하철 역의 어르신은 익숙한 길을 나름 노련하고 품위 있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내게 안내받기 의무를 강요하신다. 고령화 시대 어른들의 일자리 문제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할 우선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번 사업은 그에 부합하는 훌륭한 고민의 산물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업이든 시행착오와 수정은 불가피 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 안승준
  • 입력 2017.03.24 10:42
  • 수정 2018.03.25 14:12
ⓒponsulak via Getty Images

나는 대체로 나의 시각장애가 내 삶의 범위를 제한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하고 싶은 것들은 최대한 방법을 찾아 내어 할 수 있도록 만들고 할 수 없다는 편견들을 걷어내는 것에서 쾌감까지 느끼곤 한다.

때로는 국가나 관계기관에 지원을 요청하여 그들의 사회적 책무를 이끌어 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복지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각상태는 현대의학의 한계와 미처 지원서비스가 준비되지 못한 일부 사회영역들 그리고 국가의 예산사정과 맞물려 극소수의 행위들은 현재는 불가능이라는 제한적 포기를 선언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당장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의학적 한계일 것이고 화가가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의 준비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욕구를 양보하게 되는 결정적 상황의 하나는 이해가 충돌하게 되어 나를 위한 시스템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예상이 매우 강력할 때이다.

내가 수술하는 의사가 된다거나 마을버스의 운전을 맡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나를 위한 지원들이 따라 붙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 하나의 직업창출을 위해 목숨을 담보해야만 할 것이다.

월드컵 경기에 시각장애인 국가대표 할당을 건의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내 꿈의 실현은 곧 5천만 국민의 꿈을 양보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므로 그것도 쿨하게 양보하기로 했다.

요즘 서울시에서 지하철을 타면 곳곳에 어르신들이 나오셔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시곤 하신다.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배려 가득한 언사와 푸근한 덕담들은 단순한 안내를 넘어선 감동을 선물해 줄 때가 많다.

뉴스 기사들도 은퇴하신 어르신들의 취업과 시각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동시에 해결한 모범적 복지사례로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은 나도 동의하고 서울시 게시판이라도 들어가 칭찬글이라도 남기고 싶은 것이 진심이다.

그런데 현실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운 장면만으로 결론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이용하는 지하철 역의 어르신은 익숙한 길을 나름 노련하고 품위 있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내게 안내받기 의무를 강요하신다.

거동이 불편하신지 천천히 가도 그리 늦지 않는다는 말씀을 덧붙이시며 내 팔에 매달리듯이 함께하시던 처음 며칠은 그냥 아버지의 차조심 염려같다는 느낌도 들어서 마지 못해 안내를 허락해 드렸다.

그런데 늘 출근길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어서 몇 차례 안내를 거절한 어느 날엔 어르신 걱정을 무시한다는 민망한 꾸지람이 돌아왔다.

지난 주말 낯선 장소에서 약속을 잡았을 때에는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께서 길을 찾느라 너무 힘들었다면서 처음 안내신청 통화를 한 지 30분이 지나서야 나타나시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친구들과의 만남시간을 늦춰야 하기도 했다.

할머님은 지하철 구조에 익숙하지 않으신지 방향을 정하는 것도 출구를 찾는 것도 너무도 힘겨워 보였고 그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결국 나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되돌아 오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글을 써 내려가면서도 참으로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사업의 취지와 방향은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서두에도 말씀드렸듯 아무리 좋은 복지라도 누군가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라면 그 정도와 현실적 상황에 비추어 재검토하고 개선할 부분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계단을 오르기도 힘드신 어른을 부축해서 올라가는 일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출구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내 약속장소를 변경해야 하는 일은 어르신들의 일자리 복지를 위해 시각장애인들이 마땅히 견뎌내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사를 보면 나름의 교육들과 사전 오리앤 테이션들도 받은 분들로 선발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느끼는 서비스의 질은 아직 많이 불편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어르신들은 많지 않은 돈을 받으시면서 봉사에 가까운 일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하철 역사 내의 길은 숙지하신 분들을 배치해 주셨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체력으로 계단 정도는 오르실 수 있고 크게 적힌 출구번호들과 안내 방향 정도는 알아보실 수 있는 시력을 바라는 나의 요구가 그리 무례하거나 무리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령화 시대 어른들의 일자리 문제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할 우선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번 사업은 그에 부합하는 훌륭한 고민의 산물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업이든 시행착오와 수정은 불가피 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나의 글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약간의 후퇴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의 고민은 더 나은 사업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부디 나의 의견들이 어르신들에게나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지를 위해 고민하시는 관련 종사자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좋은 소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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