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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들고 역사 속으로

혁명의 일차적 성공이 혹시라도 4·19 이후와 같은 변질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는 87년체제의 단순한 변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어느 자리에서 하든 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광장'과 '일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깊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시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주중의 힘든 일상을 개혁하기 위해서이고, 주중의 압박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주말의 행동을 통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아닌가.

  • 염무웅
  • 입력 2017.03.16 10:02
  • 수정 2018.03.17 14:12
ⓒKim Kyung Hoon / Reuters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판결문을 읽어나가던 이정미 헌재소장대행의 입에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말이 마침내 나왔을 때 내 입에서도 저절로 환성이 터져 나왔다. 헌법재판소가 설마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을 하랴 믿으면서도 내내 조마조마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중계하는 텔레비전 화면은 감격에 겨워 얼싸안거나 어깨춤을 추는 시민들을 보여준 데 이어, 얼빠진 듯 침묵하다가 악을 써대는 다른 시민들을 비춘다.

촛불, 혁명을 향하다

사실 박근혜정권은 출발부터 수상쩍은 바가 많았다. 하지만 경제민주화 등 사탕발림 공약에 설마 이명박보다 못하겠나 하는 기대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약이 휴지가 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속았구나!"라는 느낌이 고개를 드는 시점에 결정타가 터졌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476명의 승객을 싣고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하여 304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여객선의 침몰 자체에도 해운회사와 관계당국의 엄중한 책임이 따르지만, 침몰 후 보여준 무능과 무책임은 국가의 존재이유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의문의 7시간 뒤에 나타나 잠 덜 깬 소리를 지껄인 박근혜였다. 끔찍한 광경을 발 구르며 지켜본 국민들에게 대통령의 몽롱한 정신상태는 분노를 넘어 깊은 상처로 남았다. 지도자로서의 식견과 능력은커녕 인간으로서의 감수성과 분별력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음이 너무나 뚜렷해진 것이었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그보다 나을 게 없는 자영업자들, 미래를 박탈당한 청년실업, 숨 막히는 학습노동, 말 그대로 '헬조선'의 현실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은 이화여대에서였다. 작년 여름부터 계속된 학생들의 끈질긴 농성투쟁에 힘입어 공권력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 사익 챙기기에 나섰던 불가사리의 꼬리가 잡혔던 것이다. 위기를 느낀 박근혜가 국회에 나와 개헌 카드를 꺼내든 것은 차라리 다음 순간의 폭발을 위한 준비동작이 되었고, 그날 저녁 8시 jtbc 뉴스룸의 태블릿PC 보도는 쌓인 인화물질에 불을 당긴 셈이 되었다. 사람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세월호 유가족들의 농성장이 있는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10월 29일 토요일 오후의 첫번째 촛불집회는 "하야!" "퇴진!"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으로 광장을 들끓게 만들었다.

토요일마다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집회가 순식간에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촛불은 점차 혁명의 기운을 띠어갔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최측 집계 100만이 참가한 11월 12일의 제3차 집회였다. 시청역에 내려 친구와의 약속장소인 대한문 앞으로 가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이날 약속 없이 소설가 황석영을 만난 건 전화 덕분이었고, 우연히 마주친 시인 김용택을 놓친 건 파도처럼 물결치는 인파 때문이었다. 도처에서 가족, 친구, 연인, 동료들이 만났다 헤어지고 그러다 다시 만나 식당으로 술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동지적 감정을 공유하고 가족으로서의 친밀성을 회복하게 됐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들었다. 산산이 망가진 공동체의 복원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축제로서의 혁명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는데 역사야말로 생물이다. 각본대로 진행되면 그건 연극이지 역사가 아니다. 수만명을 넘어 수십만이 모인 집회는 혼란으로 추락할 수도 있고 혁명으로 승화될 수도 있다. 당연히 거기에는 수많은 우연과 창의가 개입할 것이다. 그런데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3월 11일까지 지속된 연인원 1600만명 집회에서 집단지성의 작동은 온 세계가 놀란 전대미문의 혁명을 창출해내었다.

흔히 말하듯 대한민국 역사에는 혁명으로 일컬어질 만한 두차례의 사건이 있다. 알다시피 4·19는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산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이었으나, 경찰의 무력대응은 유혈참극을 불렀다. 나는 4월 25일 오후 서울의대 구내의 함춘원에서 출발한 교수단 데모를 뒤쫓아 종로까지 걸었는데, 노교수들의 플래카드에는 "학생들 피에 보답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비정치적' 구호가 시민들을 감동시켰고, 그리하여 교수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행렬이 종로2가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폭동 같은 양상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단을 혁명의 지도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1987년의 '6월항쟁' 때엔 대구 주민으로서 두어번 서울에 왔을 뿐이다. 한창 싸움이 고조되던 날 상경하니, 거리는 돌과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전쟁터 같았다. 아무튼 이때엔 전두환 독재에 반대하고 직선제개헌을 요구하는 제도권 야당과 시위 지도부가 합세하여 교과서에 적힌 혁명의 살벌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촛불혁명은 문화행사와 정치집회를 겸한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선보였다. 『11월』(삶창 2017)이라는 중간보고 성격의 책에서 해고노동자 고동민은 이렇게 분위기를 전한다. "이름 있는 대중가수들이 본 무대에 오르자 절정에 이른 듯 광화문광장은 함성과 환호로 들썩였다. 수없이 이어지는 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의 자유발언은 너무나도 명쾌하고 기발하게 박근혜 퇴진의 이유를 설명했다."(48~49면) 한편, 부산 시위에 참가했던 소설가 배길남은 같은 책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주위 시민들의 표정은 발랄했다. 서울의 광장처럼 넓은 장소가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도처에서 모여들었고 그 열기는 뜨겁기만 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 엄마부터 연인들과 친구들, 손녀의 손을 잡은 할아버지까지 그 구성은 다양했다."(180면)

촛불집회의 바로 이 평화와 유쾌함이 다양한 국민적 참여를 불러오는 동시에 참여인원의 증가와 지속을 담보했고, 그 점증하는 압력은 국회의 탄핵결의와 헌재의 파면선고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촛불'의 평화시위는 원리적 평화주의라기보다 그 현실적 성공을 위해 '집단지성'이 선택한 탁월한 전략"(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19~20면)이라는 언급은 박근혜 파면이라는 일차적 성공을 통해 실제로 입증된 결론이라고 할 것이다.

'광장의 주말'과 '일상의 주중'

토요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귀가하면 당연히 일상으로 복귀한다. 따라서 축제의 해방감은 온 데 간 데 없고 월요일부터는 다시 일터의 압박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이 괴리에 관하여 후지이 다케시는 이런 해석을 내린 바 있다. "주말마다 펼쳐지는 축제의 시간과 월요일이면 꼭 돌아오는 일상의 시간. 큰 소리로 독재자를 비판하며 대로 한가운데를 활보하는 광장과 여전히 상사나 교사의 눈치를 살피며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할 직장, 학교 등을 우리는 큰 무리 없이 드나들고 있다. 너무나 '평화적인' 촛불집회 모습은 어떻게 보면 이 집회가 일상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태도 표명처럼 보이기도 한다."(한겨레 칼럼 2017.1.1) 평화적인 집회와 가혹한 일상의 공존에 내재할 수도 있는 혁명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라는 제목의 좌담에 참석했던 한 참석자도 후지이의 논평을 이어받아 이렇게 말한다. "이제 퇴진행동도 촛불집회 이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광장의 주말'과 '일상의 주중'의 이분법을 넘어서, 광장의 촛불을 어떻게 일상의 촛불로 옮길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앞의 『창작과비평』 92면)

'촛불집회 이후', 더구나 박근혜 파면 이후를 논의하는 것은 이 지면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제다. 그러나 혁명의 일차적 성공이 혹시라도 4·19 이후와 같은 변질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는 87년체제의 단순한 변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어느 자리에서 하든 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광장'과 '일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깊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시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주중의 힘든 일상을 개혁하기 위해서이고, 주중의 압박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주말의 행동을 통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아닌가.

지난해 11월 5일 대구의 한 여고생은 촛불집회의 자유발언 시간에 나와 "부당하고 처참한 현실을 보며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에 오늘 이 살아 있는 역사책의 현장에 나오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시위를 한다고 해서 나라가 순식간에 바뀌진 않지만 우리 자신 스스로는 변합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생각건대 사회변혁을 위한 시민적 참여와 인간내면의 감성적 변화는 진정한 혁명의 두 날개와 같다. 촛불집회의 '평화'는 "일상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태도 표명"이 아니라 촛불혁명의 현실적 성공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음을 거듭 확인하자.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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