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재명 시장의 '기본소득 그림'을 위한 변명(?)

그림을 보고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았나 보다. 하기야 호텔을 예약했다가 취소하는 무책임한 행동만으로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니 이 무슨 허경영 축지법 같은 소린가? 하지만, 조리돌림용 죽창부터 찾게 되는 반사신경을 애써 누르고 잘 생각해 본다면 이 그림을 통해 거시경제학의 가장 오랜 논란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 이 그림을 들고 왔다면 나는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이 되어서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네요. 열의가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만약에 이 학생이 영어도 좀 해서 바다 건너 크루그먼 선생께 이메일을 보냈다면 선생 역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 권남훈
  • 입력 2017.03.16 08:09
  • 수정 2018.03.17 14:12

엊그제 이 그림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한 분이 있어서 짧게 말씀드렸는데, 타임라인을 보니 생각보다 많은 인기(?)를 얻은 그림이었다.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누구나 알 만한 얘기일 수 있지만 모든 분들이 경제학을 배우는 것은 아니므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 의무가 있는 것 같아서 써본다.

그림을 보고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았나 보다. 하기야 호텔을 예약했다가 취소하는 무책임한 행동만으로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니 이 무슨 허경영 축지법 같은 소린가? 하지만, 조리돌림용 죽창부터 찾게 되는 반사신경을 애써 누르고 잘 생각해 본다면 이 그림을 통해 거시경제학의 가장 오랜 논란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뜻에서 맨날 탄핵이니 정치 얘기만 오가던 페북에 이 그림을 내려주신 이재명 시장님께 감사를 표해야겠다.

만약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 이 그림을 들고 왔다면 나는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이 되어서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네요. 열의가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만약에 이 학생이 영어도 좀 해서 바다 건너 크루그먼 선생께 이메일을 보냈다면 선생 역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학부 1학년생 수준의 미숙함이 (어떤 분들은 초등생이라 하지만) 옥에 티이긴 하지만 케인즈 재정정책의 중심논리가 살아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보고 비웃고 조롱했다면 케인즈는 물론 크루그먼 등 그의 후예들을 대할 때에도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재명 시장께서 분노한 SNS 군중들을 달래기 위해 오늘 당장 하버드 출신의 권위자를 영입해 내용을 가다듬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 동안의 비판들 중에는 (1) 호텔예약 취소가 웬말이냐? (2) 뭐 영구동력이네 (3) 문방구는 돈 갚는 거 말고 한 일이 없음 (4) 저렇게 부가가치나 비용 개념이 없어서는 금방 말아먹지 등이 눈에 띈다.

모두 합당한 비판이다. 그러니까 (1) 호텔예약 대신에 정부가 기본소득 10만원을 호텔에 지급하는 걸로 변경한다 (2) 각자 번 돈의 80%만 쓰고 나머지는 저축하는 걸로 해서 점차 순환하는 돈이 줄어들도록 한다 (3) 문방구는 호텔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든지 아예 딴 걸 구입하라고 한다 (4) 사실은 치킨이든 재료비든 인건비든 뭐든 간에 새로 번 돈을 어딘가 지출한다는 뜻이었는데 그림을 너무 간단히 그리다 보니 실수한 거라고 정중히 사과한다.

자 이렇게 바꾸면 이 스토리는 훨씬 그럴듯해진다. 거기다가 추가로 마을에는 충분히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고전적 케인즈 이론에 따르면 새로 투입된 것은 기본소득 10만원뿐이지만 이 마을의 GDP는 50만원이 늘어난다!! 처음에 투입한 10만원을 빼더라도 40만원이나 더 늘어났으니 무한동력까지는 아니라도 여전히 마술같은 결과 아닌가? 이쯤 되면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이 가져다주는 경제 활성화입니다"라는 시장님의 호기로운 주장이 좀 다르게 들리지 않는가?

그러니 여러분이 이 그림을 보고 이 시장님을 비웃고 조롱했다면 케인즈는 물론 크루그먼 등 그의 후예들을 대할 때에도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영구동력과 다섯 배 뻥튀기는 엄연히 다르지 않냐고? 이 시장님은 기본소득은 지역상품권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소비'되어야만 가치가 생긴다는 점도 명백히 하셨다. 그러니 마을사람들이 이에 감명받아 추가로 번 돈을 저축 없이 모두 쓴다면 영구동력이 재림할 것이오, 하다 못해 저축액을 10%로만 줄여도 GDP 증가분이 10배가 되는 기적이 재현된다. 모르긴 몰라도 경제원론 책 정도는 보신 분이다. 대충 보신 것 같아서 문제지.

진지함을 되살려 말하자면 나는 이 시장님의 주장이 옳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케인지언 재정정책의 허구성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정치인들이 재정정책 확대를 주장할 때 유권자들은 그 목적과 유효성, 한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재명 시장님의 그림 솜씨는 너무 투박해서 문제점이 쉽게 드러나 보였지만, 전문가의 덧칠을 동원 가능한 다른 후보들의 정책을 보면서는 그러기가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을 위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그 목적만 가지고도 충분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케인지언 재정정책은 그 자체만으로 마술 같은 결과를 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케인즈가 틀렸다거나 재정정책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재정정책은 정부의 비용지출이므로, 정부가 쓸 만한 데 돈을 썼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점부터 지적해 두자. 다리나 공원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을 위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그 목적만 가지고도 충분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걸 넘어서서 재정정책이 경제활성화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할 때다. 경제는 마술이 아니므로 투입된 것 이상의 결과를 내는 일은 없다. 하지만, 케인지언 재정정책은 때때로 경제활성화에 효과적인데, 그건 경제가 무언가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으로 한정된다. 가구점에는 침대가 쌓여 있고, 치킨집에는 파리만 날아다니고, 문방구는 장사가 안 되어 허덕이고 있다면 호텔주인이 갑자기 나타나 (정부가 지급한) 10만원을 쓰기 시작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니냐?라고 성급히 나서시기 전에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그냥 마을 사람들끼리도 누군가 돈을 쓰기 시작하면 똑같은 효과가 발생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침대나 치킨, 문방구가 안 팔린다면 좀 싸게 하면 팔리지 않을까?

그렇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 이유는 뭔가 이를 가로막는 요인이 경제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가 돈을 씀으로써 이렇게 막힌 부분을 확 뚫어 줄 수 있을 때 경제 활성화 효과가 비로소 나타난다.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을 주고 돈을 쓰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부분은 현재 경제가 뭔가 꽉 막혀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냐라는 것과, 그 막힌 원인이 정부가 돈을 쓰면 풀리겠느냐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논쟁은 주로 첫 번째 부분에 맞추어져 있다. 고전파나 합리적 기대론자 등은 비정상적 상황은 그야말로 비정상이므로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마을 주민들 스스로 알아서 금방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케인지언들은 비정상적 상황이 거의 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20년 동안 헤맨 일본을 보라). 두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니까 아직도 서로 싸우고 있지.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부분은 두 번째일 수도 있다. 돈을 쓰냐 안쓰냐가 아니라 경제가 짓눌려 있는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에 따라,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을 주고 돈을 쓰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원인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이고, 정부가 이를 해소할 수 있다면 돈을 굳이 안 쓰더라도 상당한 효과를 낼 것이다. 트럼프가 들어서 재정지출의 첫삽을 아직 뜨지도 않았는데도 미국 경제가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에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데도 그 동안의 대통령들이 이를 달성하지 못했고, 트럼프가 일급 똘아이로서 다른 정치가들과는 달리 '한다면 한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크루그먼 선생이 절실히 원하던 건데 왜 그렇게 악담을 퍼붓는지 알 수가 없다).

반면, 정부가 돈을 쓰더라도 세금으로 도로 걷어갈 것이 확실하거나 경제가 엉망으로 운영될 것이 뻔히 눈에 보인다면 효과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참고로 Valreie Ramey(2009)의 연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재정지출 승수는 0.6~1.2 사이로 추정된다. 그 말은 정부지출을 10만원 늘리면 GDP는 보통 (정부지출액을 포함해서) 6만원~12만원 정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마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정부지출액을 당겨 쓰느라고 생기는 문제점은 별도다.

한편, 2008년 경제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오바마 정부가 대규모 경기부양에 나설 때 이들이 예측한 재정지출 승수는 1.57이었다 (당시는 경제가 매우 비정상적인 상태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어제 동료에게 들은 바로는 한국의 재정지출 승수도 1 주변이라고 한다.

(한 줄 결론) 이재명 시장님은 기본소득 주장하시려면 경제활성화 말고 그냥 소득분배 관점으로만 주장하시는 게 좋겠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권남훈 #이재명 #기본소득 #경제 #정치 #그림 #케인즈 #재정정책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