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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고 싸우면 '박근혜' 돌아온다

2017년 3월 10일의 불가역적인 결정에 따르는 것은 규칙을 존중하는 것이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행위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여전히 불복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내 생각과 다른 소수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대통령 박근혜의 일탈에 관대하고, 선의를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가 든 세대다.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살아온 과정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마음대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탄핵을 지지하는 다수는 상처받은 소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해서 극단적인 충돌을 피해야 할 것이다.

  • 이하경
  • 입력 2017.03.14 07:49
  • 수정 2018.03.15 14:12
ⓒ뉴스1

박근혜 전 대통령만 세상과 민심을 몰랐다. 마지막까지 기각을 확신했다. 8명의 헌법재판관이 전원 일치로 탄핵 인용을 결정하자 충격 속에 다시 확인해 보라고 참모에게 지시했다. 승복선언을 하지 않고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사저로 돌아간 자연인 박근혜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억울함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고 했다. 기대했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헌법재판소는 박근혜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는 의무를 저버리고 최순실을 비호한 것은 '헌법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인 국민을 조롱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통치자는 권력을 자제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된다는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잊었던 것이 아닐까.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민주주의는 권력을 보이게 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며, 보이지 않는 권력(invisible power)의 영역이 최소한으로 축소돼야 한다"고 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보비오의 기준에서 보면 박근혜 정부의 정치체계는 완벽하게 독재정치의 범주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박근혜 옹호자들은 전임 대통령들에 비하면 비리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항변한다. 43년 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한 리처드 닉슨의 지지자들도 "도청은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대통령도 했고, 일종의 관행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탄핵의 기준은 전임자의 행위가 아닌 헌법이다. 전임자의 잘못이 현직 대통령의 과오를 면책시켜줄 수는 없다.

박근혜 퇴진 과정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이 나라에서 불유쾌하게 반복된 경험법칙을 전복시킨 드라마틱한 서사다. '살아 있는 권력'의 비리를 언론이 폭로하자 시민은 촛불로 저항의 대열에 합류했고, 국회는 여당 일부까지 가세해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탄핵안을 의결했고, 특검은 최선을 다해 수사했고, 헌법재판소는 전원 일치로 파면을 결정했다. 감히 맞설 수 없었던 제왕적 권력을 헌법이 정한 민주적 절차에 따라 평화적으로 퇴진시킨 것이다.

모두가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기적같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영화관 스크린에서나 존재하던 법치와 민주주의가 내 삶의 한가운데로 성큼 걸어 들어온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박 전 대통령이 폭력 없이 물러난 것은 한국의 젊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이제 통치의 대상이던 국민은 역사의 능동적 주체인 시민으로 호명될 자격을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했다.

헌재의 결정은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만천하에 선포했다. 국민의 공복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법 위에 군림하고 법을 수단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제왕이나 공주를 참칭하는 독재자가 감히 주인인 국민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호령하는 일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은 비로소 수명을 다했고, 이 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실질적인 국민주권 시대가 열렸다.

2017년 3월 10일의 불가역적인 결정에 따르는 것은 규칙을 존중하는 것이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행위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여전히 불복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내 생각과 다른 소수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대통령 박근혜의 일탈에 관대하고, 선의를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가 든 세대다.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살아온 과정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마음대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탄핵을 지지하는 다수는 상처받은 소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해서 극단적인 충돌을 피해야 할 것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정의를 독점해선 안 된다. 법의 정당성에 기댄 안티고네와 법의 실정성을 무기로 삼은 크레온은 서로 자기가 정의의 편이라고 확신하고 대결했지만 모두 비극적 파멸을 맞았다. 헌법학자인 박은정 서울대 교수는 "법의 원천이 대립적인 것들의 공생에 있음을 보여준다"(『왜 법의 지배인가』, 돌베개)고 했다. '의견 차이를 인정하고 싸우지 않기로 하는(agree to disagree)' 열린 태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핍박하기 위해 시대착오적인 블랙리스트를 만든 박근혜의 파멸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평화적으로 촛불 시민혁명을 완성할 수 있다.

케네디는 "평화적인 혁명을 무력화시키는 이들은 폭력적인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여기서 촛불과 태극기의 대결을 끝내지 않으면 그 대결이 우리를 끝내게 될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싸워서 박근혜식 파국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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