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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임기 4년 동안 대한민국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

  • 허완
  • 입력 2017.03.10 11:57

지난 2013년 2월 25일 오후 18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뒤 청와대에 도착한 박근혜 대통령(가운데)이 허태열 비서실장(뒷줄 오른쪽),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청와대 본관 집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저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국민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습니다.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당선인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은 당선인사 속 다짐과 정반대로 질주해 온 시간이었다. 국내에선 집권 기간 내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갈라치기 정치에 나섰고, 강경하고 일방적인 외교로 한반도를 격랑에 몰아넣었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행정부의 거수기로 전락시켜 정치의 ‘정쟁화’를 야기했고,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기본적 책무도 수행하지 못했다.

국민 생명 못지킨 무능 정부

2014년 4월16일 오전 대한민국을 충격과 비탄에 잠기게 한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오후 5시15분에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다 입었다고 하던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당시 사고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박 전 대통령은 해경 해체 뒤 국민안전처를 신설한다는 대책만 내놓았을 뿐,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세월호 유족을 위로하기는커녕 면담 요구조차 거부했고, ”외부 세력이 (유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세월호특별법 제정 및 운영을 사실상 ‘방해’했다는 것이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서도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16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전남 진도해상에서 발생한 세월호 여객선 침몰사고와 관련 상황 보고를 듣고 있다. 청와대 제공.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이자 2016년 마지막 수요일인 28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263차 수요시위가 열렸다. 올해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추모제를 겸해 열린 수요시위를 마친 참가자들이 한일합의 무효를 촉구하며 외교부까지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세월호 참사 1년 뒤 발생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파동은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함을 재확인시킨 사건이었다. 2015년 5월20일 첫 감염자가 발생한 이후, 메르스가 병원 응급실 감염자를 통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동안 박 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첫 확진환자가 나온 지 엿새 만에 국무회의 자리에서 처음 대면보고를 받았고, 6월3일에서야 대통령 주재 ‘메르스 대응 민관 합동 긴급 점검회의’를 열었다. 메르스는 공식적으로 종식이 선언된 같은해 12월23일까지 ‘186명 감염, 38명 사망’이라는 비극을 남겼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에도 이후에도 메르스 사태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사드 강행, 외교 헛발질…불안해진 한반도

올초 부산 ‘평화의 소녀상’ 추가설치로 불거진 일본과의 갈등 악화,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철회 요구 등으로 한국 외교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져있다. 중국의 경제보복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뾰족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갈등의 자초한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7월 중국·러시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드 배치를 공식화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미사일방어 체계의 일환인 사드가 한국에 배치될 경우, 동북아 지역 전체의 전략적 균형이 훼손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해왔다. 양국에 대한 설득작업 없이 사드 배치가 속전속결로 이뤄지면서 중국은 사회·문화·경제 등 전방위적인 압박책을 구사하고 있다.

2015년 12월28일 타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 참사로 기록된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최종적·불가역적인 합의”를 타결해버렸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을 기회를 한국 정부가 앞서서 차단한 셈이다. 2015년 8·25 남북 고위급 합의로 해빙기를 맞았던 남북관계는 이후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조처 등으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전의 냉전기로 회귀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2016년 12월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1970년대로 되돌린 민주주의 시계

박 전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린 결정적 계기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지만, 이런 최악의 국정농단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박 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다. 공조직이 아닌 ‘비선실세’에 의존한 통치는 집권 첫 해의 인사참사로 징후를 드러냈다. ‘수첩인사’, ‘불통인사’라는 평가 속에 취임 한달 동안에만 5명의 장·차관 후보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또 국무총리 후보자 가운데 김용준·안대희·문창극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전에 자진사퇴했고, 이완구 전 총리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 돈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기되면서 자진사퇴했다.

반면 자신에게 불리한 이슈가 발생하면 정면대응이 아닌 다른 이슈로 치환하는 ‘국면전환의 정치’로 판을 주도해왔다. 정권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될 뻔한 국정원 댓글 사건 기소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문제’로 비화됐고, ‘정윤회 비선실세’ 문건 파동 때는 ‘문건 유출사건’으로 호도하며 위기를 넘겼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횡령·직권남용 혐의를 감찰하던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기밀 누설’로 공격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2015년 11월3일 오전 11시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와 관련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대선 과정에서 ‘100% 대한민국’을 외쳤던 박 전 대통령은 취임 뒤 통합진보당 해산,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등 여론이 첨예하게 맞서는 사안에 드라이브를 걸며 ‘2개의 대한민국’ 전략을 구사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 기조에 반대하는 야당을 ‘민생 대 정쟁’ 구도에서 공격하며 정치혐오를 부추겼다. 집권 4년을 관통하는 ‘갈라치기’ 정치는 탄핵심판 막바지까지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찬성-반대를 두고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극렬히 벌어지고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은 탄핵반대 집회를 주관하는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쪽에 감사메시지만 보냈을 뿐 국론통합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1월25일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이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 '정규재 TV'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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