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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 문학몹 첫번째 현장 참가 후기

파렴치한 가해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은 상황이 그토록 나빴다는 걸 몰랐다는 변명은 그리 유효한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증언은 쌓여갔고 참담함은 커져갔다. 아무것도 우리를 치유할 수 없었다. 아니, 우리는 치유되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아갔다.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해도 그 가해를 묵인해온 침묵의 카르텔이 있었기에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상처받아왔다는 걸 모를 수는 없는 것이다.

ⓒ트위터

#연루

지난 2월 17일, [문학3]이 마련한 문학몹의 첫번째 현장 <#문단_내_성폭력, 문학과 여성들>에서 시인 하재연은 말했다. 2016년 가을을 지나오며 문학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예전과는 같아질 수 없었노라고......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2016년 가을, '문단 내 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SNS를 통해 하나둘씩 올라왔던 증언들은 시인 하재연뿐 아니라 문학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던 사람들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안겼다. 파렴치한 가해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은 상황이 그토록 나빴다는 걸 몰랐다는 변명은 그리 유효한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증언은 쌓여갔고 참담함은 커져갔다. 아무것도 우리를 치유할 수 없었다. 아니, 우리는 치유되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아갔다.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해도 그 가해를 묵인해온 침묵의 카르텔이 있었기에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상처받아왔다는 걸 모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 뒤 잊곤 했던 어떤 풍경과 언어들이 고통스럽게 상기되었고, 등단이라는 제도를 통과하여 글을 쓰는 나의 하루하루가 노동이 아니라 권력이 되는 상황이 버겁기만 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알게 되었으므로 예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시간이 가까스로 희망이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성역화

2004년 등단 이후 한동안, 나는 초대장도 없이 종종 문단 술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반겨주는 이가 없는데도 꿋꿋이 한 자리를 차지했던 건 작가들―이전엔 책에서만 보았던 그들―을 멀리서나마 보는 게 황홀해서이기도 했고, 그 속에 끼여 술을 마시면 나도 이제 작가라는 허가를 받은 것 같아 우쭐해서이기도 했다. 황홀과 우쭐함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내 손에 초대장이 없다는 게 민망해서였는지, 그때 나는 내가 만난 문단 사람들에게 늘 호의적이었다. 아니,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맹목적인 호감에 가까웠다. 정중하고 수줍음을 타는 대개의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와 정반대로 보이는 작가들에게도 나의 호감은 차고 넘쳤다. 술에 취한 어느 시인이 여성 작가들만 모여 앉은 테이블에 와서 시비를 걸어도, 나이 지긋한 중견 소설가가 성적인 농담으로 좌중을 압도해도, 이제는 그 장르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또래 작가가 내 소설 속 정사 장면을 언급한 뒤 무례한 질문을 해와도 나는 이해했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화를 내지 않았고 사과를 요구한 적도 없다. 문학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은 평균치를 웃도는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을 테니까, 몽상과 일탈과 반칙이 그들의 편이고 이제 나 역시 그 세계에 소속되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런 예외적인 부류도 있어야 데면데면하고 경직된 술자리 분위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진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문학몹 현장의 발언자였던 논픽션 작가 은유가 지식인 남성의 가부장적 시선을 늘 경계해왔으면서도 시인만은 예외로 둔 일종의 성역화에 대해 언급했을 때, 나는 내 몸에 배어 있었던 관대함을 떠올렸다. 성역화와 관대함은 기표만 다를 뿐, 똑같은 마음으로 구성된 단어일 것이다. 작가는 세상의 상식과 윤리의 잣대에서 비껴 있어도 된다는 느슨한 마음......

그렇다면 누가 그 성역을 부술 수 있는가. 결국, 연루된 자들이 연대하여 부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연루되었다는 자각과 연루되었으므로 힘을 보태야 한다는 의지가 그 연대를 단단히 하고 확장하지 않을까.

미비하게나마 연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페미라이터'가 결성되었고, 폭로 이후 역고소를 당하고 있는 피해생존자의 법률 지원을 돕는 프로젝트도 실행 중이다. 많은 작가들이 문단 내 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작가서약을 하기도 했다.

이제 겨우 한걸음을 내디딘 이 연대가 금세 잊히고 무너진다면 더 큰 허무와 패배감을 안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작은 걸음에서 시작되는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작은 걸음과 작은 걸음이 모여서 페미니즘이 상식이 되는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아무려나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글쓰기에서의 여성혐오

한명의 여성작가로서 문단 내 성폭력의 피해생존자 편에서 함께 가겠다는 의지는, 엄밀히 말하면 작품 밖에서 생성되어 작동된다. 그러나 작품 밖에서의 움직임과 목소리는 글 쓰는 사람의 본질적 임무가 될 수 없다.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이제 나는, 무엇을 써야 하는 것일까.

문학몹 현장에서도 이 문제는 큰 화두였다. 소설가 이수진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중성적인 화자를 내세운 작품을 주로 써왔는데, 그런 검열이 또 하나의 여성혐오란 걸 깨달았다고 밝혔다. 어떤 화자를 내세우든 작품 안에서 설득되면 될 텐데,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적인 것을 억압해왔다는 것이다. 고양예고 졸업생인 오빛나리는 문학작품 속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가 대상화되는 지점이라든지 여성인물이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전형성을 띠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1부의 마지막 발언자였던 편집자 강소영은 (그 인격의 결함을 덮을 만큼) 위대한 작가는 없다고 말했다.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작품이어야 하되, 동시에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적 여성혐오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 것이다. 2부에서는 이 문제가 좀더 풍요롭게 논의되었다. 문학비평가 심진경은 문학작품 안에서 남성인물의 과장된 자기비하와 여성을 이용한 극복을 이야기하며, 그 문학성과 진정성의 한계를 환기시켜주었다. 심진경의 발언에 오버랩되는 작품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중엔 내가 쓴 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남성을 구원하는 것이 여성일 수 있고, 그 여성은 전형을 탈피하여 문학성의 저변을 확대할 수도 있다. 문학은 규정되지 않을수록 문학다우니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번쯤 글쓰기 앞에서 질문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쓰려는 이 여성인물은 주체적인가, 남성의 시각과 욕망으로 대상화되지는 않았나,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는 있을까, 그런 식의 질문을...... 현실에서의 태도뿐 아니라 글쓰기에서의 문제의식도 이제는 예전과 같아질 수 없는 것이다.

#전하고 싶은 말

페미니즘이 나를 구원한다.

문학몹 현장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방청석에 앉아 그 말을 들으며 페미니즘은 결국 휴머니즘이란 것을, 약자를 위한 것이며 한 사람의 꿈과 노동과 존엄을 지키는 것임을, 나는 새삼 상기했다.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가 문단 안팎에 울려퍼질 수 있도록 그 볼륨을 높이는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는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여성의 입장에서 그 내용과 주제를 고민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민과 다짐에 앞서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왔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은 평균에도 못 미쳤다는 걸 말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투사하는 일이 드물었고 여성이기에 받는 불평등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문학몹 현장에서 나는 내내 부끄러워서 발언자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끄러움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지면을 빌려 피해생존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후기를 써달라는 부탁에 나는 흔쾌히 응했다.

마지막으로, 이제 그 말을 전한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더이상 자책하지 마세요. 살아주세요.

끝까지 지지하겠습니다.

* 이 글은 [문학3] 홈페이지[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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