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자는 꽃이 아니라 인간이다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 경험을 연재하면서 남성들에게 많은 댓글과 메세지를 받아왔다. 대표적인 메세지는 이런 것들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다" "필자가 그런 남자들만 만나고 너무 극단적인 경험만 해온 것 아니냐" "자극적인 소재로 인기몰이 하려는 거냐" "강간범을 신고 안 하고 뭐했어?! 신고해!" "남자도 비슷하게 힘들다, 너무 남자 여자 갈등을 부추기지 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 홍승희
  • 입력 2017.03.08 05:52
  • 수정 2018.03.09 14:12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 경험을 연재하면서 남성들에게 많은 댓글과 메세지를 받아왔다. 대표적인 메세지는 이런 것들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다" "필자가 그런 남자들만 만나고 너무 극단적인 경험만 해온 것 아니냐" "자극적인 소재로 인기몰이 하려는 거냐" "강간범을 신고 안 하고 뭐했어?! 신고해!" "남자도 비슷하게 힘들다, 너무 남자 여자 갈등을 부추기지 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첫째, 모든 남자가 안 그렇다는 거 안다. 안 그런 남자들도 충분히 많이 만나왔다. 지금도 이런 경험을 말했을 때 가장 공감해주는 주변 사람 30%가 남성이다. 그들은 당신처럼 "모든 남자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내가 이런 글을 쓸 만큼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안다.

또한 그들은 당신처럼 "모든 남자를 가해자 취급하지 마!"라고 아픈 경험을 얘기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의 억울함과 결백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할 만큼 인정욕구에 목 마른 사람들이 아니다.

"자극적인 소재로 인기몰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한국 사회가 여성이 자신의 '자극적인' 성적 경험을 이야기하면 얼마나 눈총을 받고 고생하게 되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용기를 내서 한 이야기를 응원하고 격려해준다, 또한 소설 같고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현실이 더 말도 안되게 잔혹하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지 알기 때문에 자극적이라고 해석하지 못한다. 경험은 고매하고 추상한 그의 담론에 비해 당연히 자극적이라는 걸 안다. 평소 자신의 권력을 성찰하며 타자의 '자극적인' 고통에 귀를 열어 놓고 함께 아파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더 조장하지 마라"고 남녀갈등을 화성에서 온 남자랑 금성에서 온 여자이니 (혹은 여자는 음, 남자는 양,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이니) 어쩔 수 없는 갈등이라고 쉽게 판단해버리지 않고, 내가 모르는 고통과 갈등과 세계가 있다는 걸 수용하고 겸손하게 공부하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다.

또한 성차별과 성폭력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걸 '간접적 경험과 배경지식의 풍부함'으로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너가 특이한 경험만 해서 그러는 거 아냐?"라고 한 사람의 삶을 함부로 지레짐작하거나 판단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어떤 여자길래, 어떻게 살아왔길래'하는 손쉬운 편견과 한패가 되어 '문란한 여자' 서사를 한 인간인 나에게 갖다 붙일 만큼 무례하지도 않다.

"그 미친놈들, 찢어죽일 놈들, 왜 신고하지 않았어? 신고해!!"라고 쉬운 분노를 뱉어내기 전에, "나도 그런 적은 없을까"라고 성찰하려고 노력하며, 여성을 성적 물건 취급하는 사회에 함께 문제제기한다.

그들은 나로부터의 변화와 일상의 실천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신의 남성친구들과 있을 때 기꺼이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자고 주장하면서 친구들이 웃자고 하는 농담에 찬물을 끼얹고, "강한 사람은 작고 구체적인 것들과 싸운다"는 린디 웨스트의 말처럼 일상의 부조리와 싸운다.

자신이 남성으로서 가진 권력, 모르고 휘두를 수도 있는 권력과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발언을 조심하려고 늘 각성하고 노력하며, 이렇게 노력하는 일이 "남자가 지켜줘야 하는 여자"를 "도와주는 일"도 아니고,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티내고 생색내면서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으며 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를 몰라도) 타인이 자신의 삶을 털어놓을 때 눈을 마주치며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하는 자세가 되어있다.

고로,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당신 같은 남성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남성들이 많이 있다는 걸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과 인연이 닿지 않은 것에 여성의 날을 기념해 조그마한 감사를 표시하며, 바로 여자의 경험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평가해버리는 당신의 듣는 능력 때문에 지금 이렇게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고, 내가 평소에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이유는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진단과 평가에 움츠러들었을 여성들과 공감하고 연대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당신의 예상대로 남성들을 증오하기는커녕 내 주변의 인간남성과 인간여성들을 아주 사랑하며 살고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을 통하여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다)

p.s. 한국 사회에서 이 남자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모르겠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자. 페미니즘에 두드러기 반응을 보인다면 그는 가부장 권력을 좋아하거나,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과 타자의 고통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무감하거나 무심하거나 무식한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부장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는 인격의 바로미터이다. 여자는 꽃이 아니고 가슴이나 질도 아니고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경험상 정상적인 한국남자도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생색내고 티내고 인정받고싶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란 것. :)

나는 꽃이 아니라 인간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홍승희 #여성의 날 #여성 #사회 #페미니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