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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생활 5년, 혼자라도 괜찮아

저는 30대 중반이기 때문에 마냥 '런던 생활이 훨씬 좋고, 한국은 절대 따라갈 수 없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한국이 그립기도 해서 돌아갈까 고민도 많았어요. 하지만 직장생활은 아주 달라요. 개인 생활과 회사 일의 균형을 맞출 수 있어요. 휴가를 통해 개인 삶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고, 직장생활이 아닌 '내 자신' 개인에 집중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앞날을 예측할 수 있잖아요. 저는 여기 오면서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물론 이민을 한다고 다 이렇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사실 전 이민이 목적도 아니었고요. 근데 한국의 30대 중반은 대부분 안정적으로 사는 것 같아요. 저는 직장생활을 계속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온 거죠.

  • 김병철
  • 입력 2017.03.29 06:46
  • 수정 2018.03.30 14:12

AOL International 사무실에서. 사진=김병철

[이민자 인터뷰⑧] 영국 런던 안승현

우리(김병철, 안선희)는 1년간 세계여행을 하며, 해외에 사는 이민자들을 만나고 있다.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 문화, 사람들 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기록을 공유한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 우리 일정을 미리 알기나 한 듯 런던에 사는 안승현씨에게 인터뷰 요청이 왔다. 그는 '해외취업과 이민생활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 때 한국의 커리어우먼을 꿈꿨던 승현씨의 런던 일상을 소개한다.

안승현(34)

- 거주지 : 영국 런던

- 영국 거주 5년 (2016년 10월 인터뷰 기준)

- AOL International 근무(워킹비자)

TimeLine

2005년 대학 졸업 후 CJ 입사

2010년 퇴사 후 영국 대학원 입학(Masterof Arts - Culture, Creativity & Entrepreneurship)

2011년 9월 대학원 졸업 후 한국 귀국

2012년 2월 런던으로 이주

2012년 9월 AOL 입사

회사 동료들과 함께. 사진=안승현 제공

어느새 영국 생활 5년이 지났다

2010년, 안승현씨는 런던 히스로 공항에 홀로 도착했다. 만 28세. 이민을 결심하고 영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1년간 석사 학위를 따고,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졸업 후 취업에 도전했고, 런던의 '외국인 노동자'가 됐다. 그렇게 시작한 영국 생활은 어느새 5년이 넘었다.

- CJ에서 일했는데 영상 콘텐츠 쪽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영화를 좋아했는데,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CJ가 너무 가고 싶어졌어요. 대중문화 쪽에선 선두였거든요. 그래서 4학년 때부터 CJ가 원하는 인재상에 맞게 짧은 경험이라도 만들어 갔어요. 그 당시 어학연수 경험도 없고 부산영화제 자원봉사한 게 전부였어요. 근데 CJ인재상을 보니 왠지 제가 거기에 적합할 것 같아서 경력을 인재상에 맞춘 거죠. 제가 대학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1학년 때부터 혼자 홈페이지 만들고 콘텐츠 만드는 건 좋아했어요.

- CJ에서 담당했던 업무는 무엇인가요?

처음엔 IPTV 방송 마케팅을 하다가, 유료채널 서비스와 콘텐츠 기획을 하는 부서로 옮겼어요. 저희 부서는 유료채널의 VOD를 기획하고, 콘텐츠를 구입해서 거기서 나오는 이익을 관리하는 신규사업팀이었어요. 콘텐츠를 기획하고 팔기 위해 마케팅도 했죠. 그래서 트렌드를 보러 해외 출장을 종종 갔고요.

매년 프랑스 칸에서 TV콘텐츠 마켓이 열려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콘텐츠 제작에 투자하기보다 구매를 했죠. 근데 한국기업은 대부분 돈이 되는 할리우드 대박 영화 이런 쪽을 구입해요. 인디 영화나 다큐멘터리 분야가 많은 마켓에서는 살 게 없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일하는 게 재미없어졌어요.

-회사를 다니다가 영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CJ에서) 5년 정도 근무했는데 입사 2년 차 때 한번 퇴사 고비가 왔어요. 그래서 마케팅에서 기획으로 팀을 바꿨는데 2년 반 정도 더 일하니 일의 흐름이 보이더라고요. 국내 콘텐츠 산업계에서 새로 할 수 있는 기획이나 창의적인 제작은 한계가 있어요. 한국의 이용자 습관과 취향도 어느정도 정해져 있고요. 그러다 보니 업무에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회사생활 4년 지나니까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더라고요.

저는 직장생활을 나이 들어서까지 하는 게 목표였어요. 근데 직장생활 오래 한 여자 선배들을 보면 세 가지 타입이더라고요. '노처녀'로 진짜 회사에서 일만 하거나, 결혼하더라도 박사 학위가 있는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거나, 아니면 아주 남자 같은 분들이요. 근데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해외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일을 관뒀어요. 당시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 안트러프러너십(Entrepreneurship)에 대한 붐이 있었는데, 마케팅을 하더라도 좀 더 문화, 예술과 관련된 일, 늘 하던 생각의 알고리즘에서 깨어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런던의 2층 버스. 사진=김병철

애정하던 브릿팝의 나라, 영국으로 떠나다

유학을 결심하고 후보지를 물색하던 승현씨는 영어를 사용하고, 문화산업이 발전한 곳 위주로 학교를 찾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 두 곳을 두고 고민한 끝에 문화를 소비하기보다는 창조하는 부분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영국으로 결정했다.

- 영국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에서 홍익대 근처에 살았는데, 예술 마케팅과 관련된 강연이나 이벤트가 많았어요. 그래서 상업적인 콘텐츠가 아니라 예술 마케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찾아보니 미국 카네기 멜런 대학과 국내 카이스트에 있는 '컬처 테크놀로지' 전공이 있더라고요. 그러다 영국의 콘텐츠 산업에 대한 KBS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제가 하던 고민과 딱 맞았어요. 영국은 이야기 문화가 발전해있어요. 북 클럽도 많고 스포츠, 브릿팝(Britpop)도 그렇고요.

당시 미국과 영국을 생각했는데, 미국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소비 중심이라면 영국은 보다 '오리지널리티'에 집중하는 환경이었어요. 예를 들면 영국에서 J.K 롤링이 해리포터를 탄생시켰고, 미국은 영화를 제작해서 상업화를 시키는 거죠. 저는 해리포터를 이용해 콘텐츠를 상업화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리포터가 탄생했는지가 더 궁금했어요. 영국이 유럽에 위치한 것과, 어린 시절 들었던 브릿팝도 영향을 미쳤고요.

- 대학원 졸업 후 취업을 했는데, 유학에서 이민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 이유가 있나요?

유학 준비하던 당시 영국에서 '크리에이티브 인더스트리'를 담당하는 부처(Minister for Culture, Communications and Creative Industries)도 만들고, 토니 블레어 정부가 주도해서 관련 학과도 개설했어요. 그중 한 학교를 선택했어요. 당시 '디지털 플랫폼에서 예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공부했는데 저는 유튜브를 활용한 '컬처 데모크라시(Culture Democracy)', 문화 민주주의라고 해야 할까요. 그 부분에 대해 논문을 쓰고 학교를 마무리했어요.

그 후에 한국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영국 정부가 유학생이 영국 대학을 졸업하면 2년 동안 일할 수 있는 PSW(Post-Study Work) 제도를 없애겠다고 한 거예요. 2011년 졸업하는 제가 마지막 수혜자였죠. 그래서 취업해서 비자를 받아야겠다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영국으로 유학 갈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서른 되기 직전인데 시집 안 가고 갑자기 유학 간다니까 처음엔 놀라셨죠. CJ 다닐 때 좋은 상사가 많았어요. 퇴사할 때 임원분들과 식사를 했는데, "네가 돌아왔을 때 직장 못 가지겠냐, 결심 잘했다"고 응원도 많이 해 주셨어요. 이런 부분을 부모님께 말씀드려 설득했죠. 다녀와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말씀드리고요.

어차피 학교 지원도 이미 했고, 1년밖에 안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나오기 전에 보수적이셨던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마음이 약해지셨어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해야지"하시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 대학원이나 취업을 위해 영어는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한국에서 일할 때도 영어 이메일을 작성하고, 외국 바이어를 대상으로 서비스 설명도 했지만 처음엔 진짜 못했죠. 대학원 수업에서 토론할 땐 버벅거려도 외국인 학생이 많아서 잘 들어주긴 했어요. 대학원 끝내고 나니 듣는 건 잘 들리더라고요. 석사 논문은 영어로 우선 제 생각을 작성하고, 그걸 모아서 정리했어요. 최종 논문은 영국인의 검수를 받고 냈죠. 영어 공부는 끝이 없어요. 지금도 일하고 생활하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오히려 지금 더 공부하고 있어요.

20세기 초 영국식 스포츠 이벤트인 '채프 올림피아드(Chap Olympiad)'에서 회사 동료들과 함께. 사진=안승현 제공

런던, 정착을 시작하다

애초 안승현씨는 '이민'보다는 해외에서 경력을 쌓고,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리를 잡고 보니,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기회가 한국보다는 런던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일단 거주를 위한 자격을 갖추기로 했다. 비자를 얻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 것이다.

- 런던 취업준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제 PSW비자가 2012년 1월 시작이에요. 런던의 집을 알아보고 이사하니까 4월이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취업준비를 시작했어요. 당시엔 해외 경력을 원했기 때문에 영국 회사, 한국회사를 따지지는 않았어요. 다만 한국어로 말하는 자리는 원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한국 대기업의 현지 채용공고를 보고 '이건 나를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헤드헌터한테 연락했어요. 바로 인터뷰도 하고, 과제도 주길래 제출했죠. 긍정적인 답변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사람을 좀 더 봐야겠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그 회사 다니는 친구들한테 들어보니 한국인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서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죠.

그 이후에는 신중하게 지원했어요.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는데 제가 외국인인지 모르고 연락이 오기도 했고요. 몇 군데 면접도 봤는데 다 떨어졌어요. 당시 셰어하우스에서 지냈는데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다행히 힘든 시간을 잘 견딘 것 같아요.

나중에는 싱가포르, 홍콩에도 이력서를 넣었어요. 영국보다는 해외취업 경력이 목적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취업이 계속 안 돼서 7월쯤엔 한국어 사용 분야에도 지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비유럽인은 2년 비자 만기 후 비자 스폰서가 필요해서 유럽인보다 불리해요. '영어 스피킹' 자리에는 유럽뿐만 아니라 영국인들과도 경쟁해야 하니 영어로 취업이 어려운 걸 인정해야 했죠.

- 지금 회사는 어떻게 들어오게 됐나요?

아랍어 담당자를 뽑는 자리였는데 유럽을 제외한 한국어, 일본어 등 다른 언어 사용자도 지원이 가능했어요. 한국어가 들어있으니까 일단 지원했죠. 보통 일주일 후에 연락이 오는데 연락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매니징 디렉터(Managing Director)에게 연락했어요. 그랬더니 인사 담당자한테 제 메일을 전달하더라고요. 인터뷰만 보게 해달라고 했죠.

다행히 연락이 왔어요. 근데 사실 아랍어 가능자를 찾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3주 동안 기다리느라 피가 말랐는데 회사에서 다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일주일 만에 5번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비디오 광고팀)을 했어요.

여기 입사 전까지 4~5개월 동안 구직을 계속했잖아요. 나름대로 기한을 6개월로 잡았기 때문에 절박함도 있었고,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에 그게 운으로 닿았던 것 같아요. CJ에서 해외 비즈니스를 하면서 다방면으로 많이 배웠던 게 도움이 됐고요.

사진=김병철

- 입사 후 맡았던 업무는 무엇인가요?

리서치부터 시작해서 데이터 관리와 서비스까지 다 하는 거였는데 한국처럼 업무 분할이 잘 되어 있지 않아요. 뭔가 중구난방이었어요. 체계가 없는 스타트업인데 돌아가기는 했죠. 디지털 광고는 명확한 영역이나 국경이 없어요. 중동,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라질 캠페인하면 국가별로 다 해야 하고요.

저랑 일하는 친구가 20대 중반이었는데 그 친구의 어시스턴트 일을 하면서 서비스를 익히는 거였어요. 제가 주니어로 입사했는데 3개월 지나니 배울 게 별로 없는 것 같았어요. 이러다가는 기획서 쓰는 것도 까먹고, 경력을 갖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바보가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다른 기업에서 채용 지원을 해 놓고 사표를 냈어요.

사표를 내고 나니 보스가 협상을 다시 하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연봉 조건, 비자 스폰서, 승진을 요청했죠.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기업에서 입사 제안을 받은 터라 아쉬울 것도 없었어요. 근데 조건을 맞춰 주더라고요.

원래 덴마크계 비디오 광고 스타트업인 저희 회사를 AOL이 인수했어요. AOL이 아니었으면 비자 지원이 안 됐을 거예요. 입사 초반에는 고난도 많았지만 재미도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오히려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작년에 저를 잡았던 보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해고를 당했는데 그 후 제 매니저가 4번 바뀌었거든요. 계속 인수되다 보니 조직 구조가 바뀌는 거죠. 지금도 이직을 계속 알아보고는 있지만 비자 문제 때문에 일단은 남기로 했어요.

- 한국 회사를 다닐 때와 어떤 점이 다른가요?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한다거나, 전략을 짜고 기획하는 기본적인 업무 형태는 같아요. 그런데 보고서가 달라요. 한국은 데이터로 보여주는 반면, 여기 기획서는 스토리텔링이 강해요. 다만 여기는 비주얼을 화려하게 해서 인사이트를 끌어내는 건 좋은데 체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아요. 저는 보고서 작성이 한국식 업무의 장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부서 이기주의도 약간 있어요. 다른 부서와 커뮤니케이션이 굉장히 많아서 그 사람들과 잘해야 하는데, 안 좋은 평판이 돌면 힘들어요. 다른 부서 사람에게 내 일을 도와주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한국에서는 다른 부서 일을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내 부서 일이 아니라도 우리 회사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도 내 일처럼 하고요. 여기는 협조하지 않아도 자기 성과와는 상관없으니까 잘 안 해줘요. 어르고 달래서 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프로젝트 캠페인 매니징을 하는데 프로젝트가 잘 끝나면 그 공을 다른 직원들한테 돌리는 작업도 해야 해요.

- 한국 회사보다 더 좋은 건 뭐가 있을까요?

CJ에선 정말 바빴어요. 지금은 오전 9시 출근해서 오후 5시 반에 퇴근해요. 균형이 좋아요. 일도 열심히 하지만 내 시간을 갖고 쉴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한국에서처럼 내 일 다 했는데 상사 때문에 남아있는 건 절대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딱 봐도 보고를 위한 보고인 것도 못할 것 같고요. 한국에서는 다 했죠. 야근도 자주 하고요. 그래도 저는 한국 직장생활에 나름 그리운 게 있어요. 모든 5년이 다 좋았던 건 아니었지만, 많이 배웠어요. 팀원 분위기도 좋았고요. 지금 회사에선 정체된 느낌이 있거든요.

런던 브리지. 사진=김병철

비주류지만 괜찮아

보수적인 영국 사회는 이방인에게만큼은 신사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외국인, 아시아인, 싱글여성'인 안승현씨가 받아야 하는 시선과 사회적 제약은 '애정하는 도시' 런던이라 할지라도 가끔은 상처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 가득 런던을 사랑하며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금씩, 깊게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 런던에서 생활하는 건 어떤가요?

직장생활 1년 정도 했을 때 한국에 갔다 히스로 공항에서 돌아오는데 '이제 드디어 집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런던이 집 같아요. 친구도 있고, 고정된 일상도 있고요. 제 동네를 갖게 된 거죠. 근처 펍이나 야채가게 사람들이 알아보고, 커피도 공짜로 주는 단골이 생겼을 때 '런더너' 같은 기분이 들어요. 종종 길거리 가다 보면 예전에 데이트했던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있기도 하고요.

- 런던은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데요. 생활비 부담은 없으세요?

혼자 직장생활만으로 살기엔 런던은 너무 비싼 도시예요. 그래서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었죠. 한국에 살 땐 명품가방 같은 것도 샀는데, 여기서 그런 건 아예 다 잊고 살아요. 한국에선 외식이 싸고 시간도 절약됐지만, 여기서는 직접 해 먹는 일이 많죠. 그래서 요리실력도 늘었어요. 물질적인 것에 돈을 쓰기보다 공연을 가고 경험하는데 돈을 많이 쓰게 돼요.

교외에 싼 지역도 있지만 저는 집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한국의 홍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요. 월세만 월급의 50% 가까이 써야 해요. 이전엔 셰어하우스에서 5년 살았는데 1년마다 월세가 올랐어요. 제가 지금 35살인데 셰어하고 싶겠어요. 혼자 살려면 비싸고, 외곽에 나가야 해요. 그래도 저는 아직은 돈을 모으기보다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서 교외로 나가지는 않고 있어요. 주변의 영국 친구들도 런던에서 월세 내면서 사는 걸 빡빡해해요. 그렇지만 런던에 기회가 다 몰려 있다고 하더라고요.

- 시간 날 때는 주로 뭘 하시나요?

공연을 자주 보러 가요. 영국을 택한 이유 중 하나가 브릿팝을 좋아해서잖아요. 작년엔 뮤직 페스티벌을 8개 갔어요. 여긴 페스티벌 문화가 굉장히 강하거든요. 저는 해외 페스티벌은 일본밖에 못 가봐서, 압축해서 많이 경험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아트 워크숍도 자주 가요. 돈 많이 안 들면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꽤 많아요.

이 모든 건 제가 싱글이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가족이라면 다를 거예요. 저는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는 조건이니까요. 또 회사 생활이 (한국에 비해) 덜 바쁘다 보니 여러 경험을 하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찾아다니며 저한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주말에는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영화나 전시도 많이 보러 가고요. 친구랑 동네 공원이나 마켓 가서 햇살 받으면서 책을 보기도 해요.

친구들과 함께한 크리스마스 파티. 사진=안승현 제공

-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인종차별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한국에선 짧은 치마나 바지가 일반적이고, 상의 노출을 조심한다면 여기는 그 반대예요. 그래서 짧은 하의는 거의 잘 입지 않게 돼요. 시선도 너무 불편하고요. '섹시한 아시아 여자애' 같은 느낌을 안 주려고 화장도 더 자연스럽게 하고 조심하는 편이에요.

직장에서도 약간의 벽이 있어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유리벽 같은 거요. 남자들과는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영국 여자들은 외국 여자를 일단 경계하는 편이에요. 아시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같은 유럽 출신도요.

한국 친구도 그립고, 아시안 정서도 그리울 때가 있죠. 동아시아인이 별로 없고, 비유럽인 친구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요. 아무리 유럽인 친구들이 있더라도, 제가 30년 가까이 가진 정서가 있는데 그런 걸 나눌 사람들을 만나기 쉽지 않죠. 그럴 땐 (정서적으로) 비주류라는 게 느껴지고 외로울 때도 있어요. 이걸 인정해야 하는데 느끼면 슬퍼요. '한국 가면 지금 힘들고 슬픈 게 단번에 해결될 것 같은데 왜 여기 있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입사 초반에 저희 팀이 대부분 영국 사람이고 저만 아시아 사람이었어요. 같은 광고팀 사람들이 회식을 간 적 있는데, 저에게 안 물어보고 갔더라고요. 속상해서 울었어요. 당시 제가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에 열등감도 컸고요.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짧은 시간 내에 적응을 한 편인데요. 아무래도 영국 문화, 런던의 문화를 경험하는 게 제 이민의 주요 이유였기 때문일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연애라든지, 문화, 언어의 장벽은 여전해요. 외국인 그것도 소수인 한국인으로 사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아요.

-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있나요?

원래는 2~3년 경력 쌓고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런던에서의 글로벌 미디어 경력은 한국에서는 프리미엄이 될 테지만, 여기선 한국의 CJ경력이 큰 매력이 없거든요. 그런데 4년 차 되는 해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직장인보다 안트러프러너(Entrepreneur·창업가)로 런던에서 꿈을 키우기로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어는 저한테 더 핸디캡이 될 거고, 시니어로 회사에서 성장하는 것도 한계가 보여요. 영어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카리스마도 있어야 하고 말발도 되게 중요하거든요. 영어를 잘하는 문제가 아니라 영국인들 사이에서 말을 잘해야 해요.

여기서 영국인과 계속 경쟁하며 광고일을 해야 한다면 직장생활보다는 차라리 제가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려면 한국보다는 여기가 훨씬 기회가 많고요. 물론 경쟁은 그만큼 치열하지만요. 런던 직장생활 3년 후 제 시야가 확 바꿔버린 거죠.

제가 평생 직장인으로 살려던 꿈이 안트러프러너(Entrepreneur)로 바뀌면서, 노동력의 이동성이 보장되는 티켓(영주권)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민을 생각하게 된 거죠. 하지만 평생을 여기서 살 생각은 없어요. 언젠가 다시 돌아오고 싶을 도시니까, 오고 싶을 때 마음껏 왔다 갔다 하려면 영주권이 있어야 쉬울 테니까요.

영국 국회의사당. 사진=김병철

- 스타트업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시아와 유럽 예술가들을 연결해주는 부티크 에이전시(Boutique Agency) 같은 걸 하고 싶어요. 상업적인 기업과 예술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요. 영주권 받을 때까지 시간이 있어서 투자받는 것에 대해 알아보고 스타트업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있어요. 영국 예술가들을 만나서 인터뷰하며 '크리에이티브 인더스트리'에 대한 책도 준비하고 있고요.

영국은 국가 차원의 예술에 대한 지원 프로젝트가 한국보다 되게 많아요. 상업적으로 예술을 활용하는 경우도 많고요. 아티스트가 예술을 업으로 하며 살 수 있어요. 여러 나라에서 아티스트가 몰려오고 그렇게 시장이 커지니 또 사람이 몰리고요.

한마디로 문화의 저변이 넓고 두꺼워요. 브릿팝도 그렇고요. 인디 밴드들이 공연할 수 있는 장소, 이벤트가 정말 많아요. 풀타임으로 직장 생활하면서, 진지하게 밴드를 함께 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인디 밴드 공연이라도 실력만 있으면 사람들은 돈을 기꺼이 내서 보려고 하니까요. 수요와 공급의 기본적인 사이클이 이뤄지는 거죠.

- 브렉시트도 있고 영국도 자국민 보호성향이 강해지지 않나요?

영국도 영국인을 뽑을 수 있는 자리는 영국사람을 뽑아야 하는 제한이 있어요. 회사가 굳이 외국인을 채용한다면 그 특별한 이유를 제출해야 하죠. 비자를 얻는 게 쉽지는 않아요. 영어가 된다고 가능한 건 아니에요. 영어가 모국어인 싱가포르 친구도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래도 기회는 더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선 대기업으로 딱 길이 정해져 있는데, 여긴 3, 4명으로 시작하는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경력을 쌓고 옮길 수 있어요. 예술가는 프리랜서로 시작하는 것도 쉬워요. 프로젝트 지원하면서 경력을 쌓고 그걸로 또 기회를 얻고요.

페스티벌에서 친구와 함께. 사진=안승현 제공

-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게 외롭지는 않나요? 혹시 결혼 생각이 있으신가요?

크게 외롭지는 않아요. 주변에 30대 싱글이 많거든요. 오히려 여기는 사람 만나는 게 무척 쉬워서 가끔은 지칠 때도 있어요. 한국 사람보다는 외국인과 더 어울리는 편이에요. 그래서 한국에서 여자친구들이랑 수다 떠는 게 그리워서 제 연애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기도 했어요.

결혼도 하고 싶죠. 근데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연애도 많이 했으면 좋겠고요. 영국생활 4년 차 됐을 때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어요. 저는 이상하게 영국식 유머가 있는 남자가 좋은데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더라고요. 주변에서는 한국 사람을 만나라는데 제 나이대의 싱글남자가 없어요.(웃음)

- 영국으로 이민을 추천하세요?

장단점이 있어요. 저는 30대 중반이기 때문에 마냥 '런던 생활이 훨씬 좋고, 한국은 절대 따라갈 수 없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한국이 그립기도 해서 돌아갈까 고민도 많았어요. 하지만 직장생활은 아주 달라요. 개인 생활과 회사 일의 균형을 맞출 수 있어요. 휴가를 통해 개인 삶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고, 직장생활이 아닌 '내 자신' 개인에 집중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앞날을 예측할 수 있잖아요. 저는 여기 오면서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물론 이민을 한다고 다 이렇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사실 전 이민이 목적도 아니었고요. 근데 한국의 30대 중반은 대부분 안정적으로 사는 것 같아요. 저는 직장생활을 계속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온 거죠.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민을 위해 하나씩 결정을 내릴 때마다 정말 무섭기도 해요. 외국인, 소수의 한국인으로 사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아요. 지금 회사(AOL)를 그만두려고 할 때 '외국 학위까지 있는데 어떻게든 먹고살겠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한국이라는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안되면 한국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나를 중심으로 한 삶과 직장생활을 영국에서 얻었다면, 마찬가지로 포기해야 할 부분도 많아요. 삶에 어떤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이민에 대한 만족감이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런던의 한 공원. 사진=안승현 제공

AOL International 사무실. 사진=김병철

AOL International 휴식 공간. 사진=김병철

맥주는 목요일 '해피 아워'에만 마실 수 있다. 사진=김병철

이미지=구글맵스 캡처

[영국]

- 기본정보

o 국명 : 영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o 수도 : 런던(London, 817만 명)

o 면적 : 약 24.482만㎢(한반도의 1.1배, 프랑스의 절반)

o 인구 : 6,374만 명(2014년)

o 종교 : 기독교(59.5%), 이슬람교(4.4%), 힌두교(1.3%), 기타

출처 : 외교부

- 이민 정보

o 교민 : 46,263명(2014년)

o 영주권 신청 : 체류 목적에 맞는 비자 획득 후, 비자별 최소 거주기간 체류 시 신청 가능

o 관련 사이트

주 영국 대한민국 대사관

영국 내무부 이민국

- 워킹홀리데이 정보

o 만 18세 이상 30세 이하 신청 가능

o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

글쓴이의 한마디 : 저희가 만난 분들의 이민 이야기는 그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비교하지도 말고, 함부로 재단하거나 동경(혹은 훈계)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저 사람은 저런 선택을 했구나'라는 정도의 시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6년 7월 18일 1년 세계여행을 떠났습니다.(유럽→남미→북미→오세아니아→아시아) 이민 1~10년 차 분 중에 저희 인터뷰 콘셉트에 적합한 분을 알고 계시다면 추천해주세요.

*작가의 블로그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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