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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vs 박사모

촛불집회와 박사모집회를 저울에 재 보니 무게가 똑같더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언론이 있다. 〈조선〉이다.

  • 이태경
  • 입력 2017.03.07 05:40
  • 수정 2018.03.08 14:12
ⓒ뉴스1

나는 그 저녁에 광장에 있었다. 거기서 나는 보았다. 촛불집회에는 이성, 질서, 상식, 법치, 정의, 연대, 관용, 진실, 아름다움이 흘러넘쳤다. 건너편 박사모(태극기 집회라는 명칭부터 바꾸자. '태극기 집회'가 아니라 '박사모집회'다) 집회에는 광기, 혼돈, 비상식, 비법(非法), 불의, 고립, 배제, 거짓, 추함으로 가득했다. 촛불집회를 지배하는 건 정당한 분노와 자신감이었다. 박사모 집회를 다스리는 건 생각이 다른 자들에 대한 살의(殺意)와 두려움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근거가 단단하고 논리가 정교하기에 폭력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박사모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근거가 없고 논리가 부재하기에 걸핏하면 폭력과 협박에 기댄다. 정당함의 편에 선 사람들은 여유가 있고 유머를 즐길 줄 안다. 부당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각박하고 비장하다. 정당함의 편에 선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흥겹다. 부당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한 없이 비장하지만, 그 비장함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워 웃음을 참기 힘들다. 촛불집회에는 우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박사모 집회는 종교행사를 방불케한다. 박사모 집회에는 어김없이 박정희(성부 하나님?)와 박근혜(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한다.

무엇 보다 촛불집회에는 자신이 주권자임을 자각한 시민들이 운집한 반면, 박사모 집회에는 스스로를 다스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신민이 집결한다. 촛불집회는 새롭게 태어나는 대한민국을, 박사모 집회는 박물관에 유폐될 화석을 각각 상징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당연히 촛불시민의 것이다. 박사모 집회에 참석하는 신민들은 자신들의 때가 이미 다한 줄 모른다. 이제 곧 날이 밝을 것이고, 참과 거짓이, 정의와 불의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촛불집회와 박사모집회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 둘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은 집회의 형식을 빌렸다는 것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촛불집회와 박사모집회를 저울에 재 보니 무게가 똑같더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언론이 있다. 〈조선〉이다. 아래 기사를 보면 〈조선〉이 촛불집회와 박사모 집회를 완전히 대등하게 취급하는 걸 알 수 있다.

98주년 3·1절인 1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광장에 거대한 'ㄷ' 자 모양의 차벽(車壁)이 만들어졌다. 경찰은 610여대의 버스를 동원해 서울을 대표하는 광화문 광장을 둘러쌌다. 이 차벽 바깥쪽에선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측의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반대로 차벽 안쪽 광화문 광장에선 박 대통령 탄핵·구속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경찰 차벽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팽팽하게 맞섰다. 차벽 바깥의 태극기 집회 측이 "특검을 구속하라"고 외치면, 차벽 안쪽의 촛불 측은 "박 대통령부터 구속하라"고 맞받았다.

이날은 두 집회 참가자들이 모두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을 지키자"고 외쳤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손에 들고 있던 태극기를 무기처럼 상대에게 휘두르며 싸움을 거는 이도 있었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야 할 정치인들도 두 패로 갈려 집회에 참여했다. 김진태·윤상현 등 자유한국당 친박(親朴) 의원들과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이 태극기 집회에 참석했고,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 추미애 대표 등은 촛불 집회에 나왔다.

이날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가 주최한 15차 태극기 집회에는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했다. 탄기국은 "500만명이 왔다"고 주장했다. 본집회가 열린 세종대로 사거리뿐 아니라 세종문화회관 앞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청계천광장, 세종로공원 등 광화문 일대에 총 62개의 대형 스크린이 설치됐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광화문광장에서 연 18차 촛불 집회에는 30만명이 참석했다고 주최 측이 주장했다.

...양측의 집회가 이어진 오후 2시부터 6시간 동안 세종로와 태평로, 종로, 을지로 등 광화문 일대 교통이 전면 통제됐다. 넉 달 넘게 주말이면 서울 도심은 이런 대규모 집회로 사실상 마비 상태다.

양쪽 참가자 가운데 일부는 마주칠 때마다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였다. 군중을 자극하는 발언도 이어졌다. 태극기 집회에선 "탄핵에 찬성한 정치인들을 척살하자" "정국에 따라 폭력을 써야 할 때는 먼저 피를 흘리자" 등의 발언이 나왔다. 촛불 집회 참가자들도 "탄핵이 기각되면 헌재에 쳐들어가자"고 했고, 일부는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부지를 내준 롯데는 망할 것" 같은 구호를 외쳤다.

경찰 차벽으로 둘러싸인 광화문광장은 고립된 섬처럼 보였다. 경찰은 광화문 광장 북단(경복궁 방면)을 제외한 3면을 차벽으로 둘렀다. 이에 따라 차벽을 사이에 두고 태극기 집회가 촛불 집회를 에워싼 듯한 모습이었다.

(낮엔 反彈, 밤엔 贊彈)

〈조선〉의 기사를 읽다보면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좌익은 찬탁(贊托)으로, 우익은 반탁(反託)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사태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렇다. 〈조선〉은 지금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수호하려는 촛불집회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파괴하려는 박사모집회를 좌우의 대립으로 덧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염려(?) 혹은 기대(!)와는 달리 대한민국은 두 동강 나지 않았고, 좌우의 이념대립도 없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수호하려는 압도적 다수의 주권자들이 이에 저항하는 박근혜-최순실 일당 및 그 추종세력들을 완벽히 제압하는 형국이다. 곧 내려질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결정은 박근혜-최순실 일당에게 내리는 정치적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조선〉은 좌우대립 프레임으로 본질을 왜곡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옳다. 〈조선〉이 어리석은 여론조작을 거듭할 경우, 박근혜를 삼킨 성난 민심이〈조선〉이라고 봐 주진 않을 것이다.

* 뉴스타파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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