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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배넌은 한갓 미치광이가 아니다. '새로운 우파'가 전세계를 석권하고 있다는 신호다.

  • 김수빈
  • 입력 2017.03.02 11:38
  • 수정 2017.03.02 12:43
White House Chief Strategist Stephen Bannon speaks at the 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 (CPAC) in National Harbor, Maryland, U.S., February 23, 2017.      REUTERS/Joshua Roberts
White House Chief Strategist Stephen Bannon speaks at the 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 (CPAC) in National Harbor, Maryland, U.S., February 23, 2017. REUTERS/Joshua Roberts ⓒJoshua Roberts / Reuters

백인 우월주의자. 반유대주의자. 파시스트. 여성혐오자. 개중 하나만 듣더라도 그닥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텐데 이 모든 표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백악관의 수석전략가이자 '트럼프의 최순실'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스티브 배넌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미 해군 장교로 7년간 복무했고 골드만삭스에서 M&A 전문가로 활약한 바 있는 배넌은 결코 만만히 여길 인물이 아니다. 배넌과 함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다녔던 데이비드 앨런은 그의 학창 시절에 대해 보스턴글로브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스티브는 우리 학급에서 가장 지적으로 뛰어난 3명 중에 틀림없이 들었다. 어쩌면 학급에서 가장 똑똑했을지도 모른다."

스티브 배넌

배넌은 트럼프의 취임사 초안을 작성하는 데 참여했으며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도 참석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켰던 문제의 반(反)이민적 행정명령 또한 그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타임즈는 '대통령 배넌?'이란 제목의 지난 1월 사설에서 배넌처럼 노골적으로 힘을 축적하는 막후 참모는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가 트럼프 행정부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이 확인되자 언론들은 배넌의 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적어도 향후 4년 동안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의 항로에 영향을 끼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배넌이 매우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론적 세계관

배넌은 작년 자신이 운영하던 라디오 쇼에서 미국과 중국이 향후 10년 이내에 남중국해에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까지는 한 극단론자의 격론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의 발언은 그가 갖고 있는 독특한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허핑턴포스트의 지난 2월 기사는 배넌이 갖고 있는 순환적 역사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지금은 미국 역사에서 네 번째의 엄청난 위기의 시기다. 우린 혁명을 겪었다. 남북전쟁이 있었다. 대공황과 세계 2차 대전이 있었다. 지금은 미국 역사에서 위대한 네 번째 전환의 시기다. 우리는 이 전환을 겪고 나서도 하나일 것이다.” 배넌이 2011년에 보수 비영리단체인 자유 복구 재단에서 청중들에게 한 말이다.

대형 위기는 “약 80년~100년 사이클로 일어난다. 앞으로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우리는 그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나라가 되거나,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거나 할 것이다.” 배넌이 2011년에 공화당 여성 단체인 프로젝트 고핑크 컨퍼런스에서 한 말이다.

“유대교-기독교 서구는 붕괴하고 있다. 자멸하고 있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 역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허핑턴포스트 2월 9일)

위의 기사가 전하듯, 배넌의 이러한 세계관/시간관은 윌리엄 스트로스와 닐 하우의 '세대론(generational theory)'에 빚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특정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리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다. 경제학에서는 쿠즈네츠 파동이나 콘트라티예프 파동과 같은 순환론이 있다. 그리고 닐 하우가 최근에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도 자인하듯이 거의 모든 고대 사회와 종교가 이러한 순환론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배넌이 푸틴을 혐오하면서도 존경하는 까닭

순환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보다 오래된 사상가 하나와 배넌과의 연관성이 보다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함께 최근 뉴욕타임즈를 장식했다. 바로 20세기초 이탈리아의 사상가 율리우스 에볼라다. 생전에는 무쏠리니와 나치 SS에 연루됐고 사후에는 온갖 극우파들의 사상적 대부가 된 에볼라의 이름 앞에 으레 따라붙은 '파시스트'라는 수식어는 배넌과도 무던히 어울려 보인다.

율리우스 에볼라의 1920년경 초상

사실 배넌의 에볼라에 대한 언급은 뉴욕타임즈의 떠들썩한 헤드라인과는 달리 그냥 지나치듯 한 것이었다. 그는 2014년 스카이프를 통해 원격으로 바티칸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 참가하여 50분에 걸친 대담을 나누었는데 푸틴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 중의 일부에서 에볼라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오늘날 블라디미르 푸틴이 갖고 있는 믿음의 기반이 되는 것을 잘 살펴보면 많은 것들이 내가 유라시아니즘이라고 일컫는 것에서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율리우스 에볼라와 20세기 초의 많은 작가들을 참조한 조언가를 두고 있다. 이들은 사실 전통주의 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지지했는데 이는 나중에 이탈리아의 파시즘으로 전이됐다.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여기에 매료돼 있다."

배넌이 에볼라를 안다는 사실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푸틴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다. 배넌은 바티칸의 컨퍼런스에서 푸틴의 정권을 '도둑정치(kleptocracy)'라고 혐오하면서도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ity)의 서구가 푸틴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역설한다.

"...그들(민중)은 자기 나라를 위한 민족주의를 원한다. 그들은 범유럽연합 같은 것을 믿지 않으며 미국의 중앙집권화된 정부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보다는 미국의 초창기 건국자들이 설계했던 것처럼 자유가 지역 수준에서 통제되는 주(state) 기반의 존재를 원한다.

나는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그가 대변하는 도둑정치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푸틴은 결국 도둑정치의 국가자본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유대-기독교적 서구는 푸틴이 전통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 특히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는 측면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한 나라의 개별적 주권은 좋은 것이며 강력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강한 나라와 강한 민족주의 운동이 강한 이웃을 만들며 그것이 바로 서구와 미국을 만든 주춧돌이 됐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보다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우파'는 우파와 어떻게 다른가

스티브 배넌의 사상은 이 지점부터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극우파'와 현격히 달라진다. 배넌은 보수의 트레이드마크인 아인 랜드식의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신봉하지도 않는다. 바티칸 컨퍼런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라:

"(아인 랜드의 객관주의적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내가 유대-기독교 서구의 '계몽된 자본주의(enlightened capitalism)'라고 일컫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처럼—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고 대상화하는 자본주의다."

배넌은 물질주의적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서구 사회에 이러한 정신성을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상징은 바로 기독교다. 그가 계속 '유대-기독교 서구'라는 표현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상은 배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실은 배넌보다 앞서 이러한 주장을 했던 인물이 있었다. 게다가 그 또한 국가 최고 권력자의 핵심 조언가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바로 '푸틴의 라스푸틴'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니곤 하는 러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이다.

200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히틀러와 알렉산드르 두긴(오른쪽)의 사진이 포함된 피켓을 들고 있다.

배넌이 앞서 인용한 바티칸 컨퍼런스에서 푸틴에 대해 말할 때 언급한 '율리우스 에볼라와 20세기 초의 많은 작가들을 참조한 조언가' 두긴은 러시아가 정교회를 기반으로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유라시아의 중심에서 또 다른 세력을 건설해야 한다는 '유라시아주의'를 제창했다. 그의 저작 '지정학의 기초'는 러시아 정치·군사 엘리트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힌 지 오래.

유럽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상의 역사는 꽤 오래된 편이다. 프랑스에서는 '신우파(nouvelle droite)'라는 이름으로 60년대 말부터 형성된 학파가 이와 비슷한 사상을 구축했다. 철학자 알랭 드 브누아가 창시한 신우파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우 정당 국민전선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국민전선의 대표 마린 르펜은 비록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이지만 2017년 프랑스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프랑스의 신우파 철학자 알랭 드 브누아

미국과 유럽, 그리고 러시아의 새로운 우파 사상은 공통점도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 모두 이민법에 대한 문제에 매우 완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가 인종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이는 반면 프랑스의 신우파(특히 알랭 드 브누아)는 인종과 문화의 다원주의에는 깊이 공감하는 편이다. 단지 다른 인종과 문화는 별개로 공존할 때가 최적이고 이질적인 인종과 문화를 무작정 섞어놓는 것을 반대하는 것.

새로운 우파가 좌파의 유산 일부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도 독특한 점이다. 프랑스 신우파는 그람시나 마르쿠제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배넌이 사담에서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로 표현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새로운 우파'는 한국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스티브 배넌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미국도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꽤 오랫동안 진행돼 왔던 이러한 '새로운 우파'의 움직임에 무지했다. 소위 알트-라이트, 대안우파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하얀 보자기를 벗은 KKK단 정도로만 여겨져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우파는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의 지하에서 꾸준히 그 세력을 키워왔고 그 결과 놀랄만한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트럼프와 배넌의 집권은 그 서막에 불과할 따름이다. 배넌이 미국에 새로운 파시즘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은 과장된 것인데다가 '배넌주의'가 미국에 미칠 영향을 잘못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아마도 이점에서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하는 우려는 미국 보수 주간지 '위클리 스탠다드'의 편집자 크리스토퍼 캘드웰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칼럼(배넌의 사상에 대해 가장 잘 비평한 글이기도 하다)에서 제기하는 것이리라: "가장 불길한 것은, 그가 거대담론에 열광하는 정치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합은 과거에도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지적으로 매우 게으르긴 하지만 미국 보수의 담론을 수입하는 일은 결코 등한시하지 않는 한국의 우파가 미국의 새로운 우파 사상을 어떻게 다루게 될 것인가도 앞으로 흥미롭게 두고볼 주제가 될 것이다. 반이민 정서와 기독교 정신에 호소하는 배넌의 새로운 우파 사상은 한국의 우파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관련기사] '알트 라이트'와 '네오나치'는 같으면서도 다른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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