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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기억할 수 있는 오늘을 산다는 건

〈문라이트〉에는 더욱 비극적으로 부연할 수 있는, 훨씬 애절하게 채색할 수 있는, 보다 극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라이트〉는 담담하고 묵묵한 영화다. 상황을 묘사하고 심리를 추측하게 만들지만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는다. 세 개의 개별적인 서사는 저마다 품고 있는 감정선을 독립적으로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서사로 떠밀려 보내지 않는다. 기승전결의 맥락 속에서 감정을 고양시켜 끝내 폭발시킬 뇌관 자체를 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 민용준
  • 입력 2017.02.27 12:02
  • 수정 2018.02.28 14:12

영화 〈문라이트〉를 통해 삼킨 여운을 깊게 내뱉어 봤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수많은 관계를 전전한다. 덕분에 두고두고 삶의 온기를 지필 사랑과 우정을 느끼며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혹자에게 타인과의 관계란 증오와 경멸의 가시밭길일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을 찬란한 우정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겠지만 끔찍한 통증으로 각성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시간은 흐른다. 증오와 경멸의 시제도 언젠가는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간다. 사랑과 우정의 시제 또한 그렇다. 성장과 함께 어떤 관계는 손쉽게 허물어진다. 다만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뿐이다.

대부분의 기억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지지만 어떤 기억은 세월이 지날수록 되레 선명해진다. 어두운 밤하늘에 한 점을 찍듯이 떠오르는 달처럼, 까맣게 지워진 시간의 망각 속에서 형형해지는 기억. 〈문라이트〉는 형형하게 떠오르는 어떤 기억 이후의 시간에 관한 영화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이란 소년이 청소년으로,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다. 하지만 소년의 성장 과정을 면밀히 따라잡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세 개의 챕터로 구분돼 있고, 세 개의 챕터는 파편처럼 나뉘어 있다. 마치 샤이론이란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기까지의 서사를 조각 내서 상자에 집어넣고 무작위로 꺼낸 세 조각을 서사순으로 나열한 것처럼 보인다.

챕터의 끝마다 익숙한 마침표가 보이지 않고, 챕터 사이마다 소실된 서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서사적 흐름이 존재할 뿐이다. 첫 챕터에 해당하는 '리틀'에는 유년기의 샤이론(알렉스 히버트)이, 두 번째 챕터인 '샤이론'에선 청소년기의 샤이론(애슈턴 샌더스)이, 마지막 챕터인 '블랙'에선 성인이 된 샤이론(트래반즈 로즈)이 등장한다.

리틀은 샤이론을 놀리는 친구들이 붙인 별명이고, 블랙은 유년 시절부터 샤이론과 우정을 쌓은 한 친구가 샤이론을 부르는 애칭이다. 리틀이 혐오를 투영한 이름이라면, 블랙은 애정이 담긴 이름이다. 리틀에도, 블랙에도, 샤이론을 향한 마음과 감정이 담겨 있다. 그 사이에 샤이론이 있다. 두 이름 사이에서 진짜 이름이 방황하듯 그렇다.

마약상인 후안(마허샬라 알리)은 마약중독자들이 득실거리는 마이애미의 슬럼가에서 우연히 만난 꼬마를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고 잠까지 재워준다. 좀처럼 말문이 없던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이 샤이론이라 말한다.

유년기의 샤이론은 홀어머니의 무관심과 친구들의 괴롭힘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간다. 그렇게 관계의 사막을 건너던 샤이론은 후안을 만난다. 그는 샤이론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된다. 아버지의 공백을 메워주는 존재이자 든든한 친구와도 같다.

그러나 훌쩍 자라 청소년이 된 샤이론은 증오로 점철된 따돌림 속에서 곤혹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그래도 유년 시절부터 마음이 통했던 친구 케빈(자렐 제롬)은 그에게 모종의 위안을 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져들고 결국 감정의 바닥에서 분노를 쥐게 된 샤이론은 무언가를 결정한다.

덕분에 샤이론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떠밀려가고, 성인이 된 샤이론은 유년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한 형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변치 않는 그리움이 자리한다. 그렇게 리틀에서 샤이론으로 그리고 블랙으로 영화도 흘러간다.

〈문라이트〉를 이루는 세 개의 단편적인 서사는 하나의 인물을 관통할 뿐 제각기 분리돼 있다. 그런데 영화상에서 나열된 서사는 관객과 함께 현재진행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누군가가 지나온 인생으로부터 채취한 파편적인 기억들의 나열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나열된 각각의 챕터는 서사적인 설명을 위해 동원했다기보단 개인적인 인상에 기댄 결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관객보단 화자 스스로를 위한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샤이론을 위한 영화다. 어떤 의미에선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샤이론들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파편적인 서사들을 과감히 이어 붙인 생경한 형식성으로 완성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문라이트〉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선 영화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누구나 과거를 기억한다. 하지만 모든 과거를 기억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삶에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감정이 효모처럼 시간을 숙성시켜야만 기억으로 발효된다. 그리고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감정이란 것이 언제나 아름답고 숭고하지만은 않다.

사랑과 우정과 함께 증오와 경멸의 시간도 깊게 각인된다. 다만 그 모든 감정은 과거가 된다. 언제나 그 이후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라이트〉를 연출한 감독 배리 젠킨스는 〈문라이트〉가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라 밝혔다. 그는 샤이론과 마찬가지로 〈문라이트〉의 배경이 된 마이애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2세 무렵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젠킨스를 친아들이라 믿지 않았고 어머니와는 일찌감치 별거했다.

또한 유년 시절 젠킨스는 어머니가 아닌 이웃의 여성에게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샤이론이 친어머니인 폴라(나오미 해리스)보다도 후안의 여자 친구인 테레사(자넬 모네)의 보살핌을 받는 데 익숙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흥미로운 건 〈문라이트〉가 이런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문라이트〉에는 더욱 비극적으로 부연할 수 있는, 훨씬 애절하게 채색할 수 있는, 보다 극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라이트〉는 담담하고 묵묵한 영화다. 상황을 묘사하고 심리를 추측하게 만들지만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는다. 세 개의 개별적인 서사는 저마다 품고 있는 감정선을 독립적으로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서사로 떠밀려 보내지 않는다. 기승전결의 맥락 속에서 감정을 고양시켜 끝내 폭발시킬 뇌관 자체를 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배리 젠킨스에게 〈문라이트〉가 담담한 기억으로 남겨진 시절이 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관통한 인생으로부터 길어낸 깨달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덕분일지도 모른다. 감각적인 통증은 시간과 함께 치유된다. 다만 잊히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삶은 자연스럽게 전진한다.

"공공연한 긍정은 때때로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려버리거나 신화적으로 창작돼버릴 수 있다. 결국 이런 방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나는 배우들에게 '이 영화의 모든 것은 회색 지대이고, 캐릭터들도 회색이며 상황도 회색'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화에는 매우 어두운 추악함이 있지만 우린 그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배리 젠킨스의 말처럼 〈문라이트〉는 있는 그대로의 영화다. 〈문라이트〉에선 종종 카메라의 초점이 빗나가며 이미지가 흐릿해지는 아웃포커스 상태의 숏을 무심하게 노출한다. 이는 객석과 스크린 사이의 거리감을 공고히 다지는 효과처럼 느껴진다.

스크린의 영상이 희미해질 때 그 너머의 세계관에 대한 감각은 되레 예민해진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시킨다. 그럼으로써 영화적 감정을 스크린 속에 동결시키고, 영화적인 현실을 더욱 면밀하게 목격하도록 객석을 끌어당긴다.

이는 〈문라이트〉를 본 관객들이 이 영화를 감정적 체험으로 휘발시키기보단 또 다른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목격으로 받아들이길 원해서였을 것이다.

마르고 작은 체격 탓에 놀림거리가 되는 샤이론은 일찍부터 경멸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 학교란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다. 심지어 부성은 부재하고 모성은 야박하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샤이론의 삶에 뜻밖의 숨을 불어넣는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증오와 경멸처럼 사랑과 우정 또한 평범한 얼굴로 다가온다. 사랑과 우정, 증오와 경멸을 전하던 얼굴들이 자리하던 시절, 온기를 전하는 얼굴의 기억과 숨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얼굴의 기억이 교차하던 삶, 그 모든 감정적인 순간들. 그렇게 지나간 시간 속에서 타인으로부터 전해지는 갖가지 감정을 달빛처럼 반사시키며 살아온 기억들.

결국 그 시절이 지금의 내 자아에 어울리는 빛을 찾도록 인도하는 여정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성찰과 누군가는 너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줄 것이라는 일말의 위안이 〈문라이트〉에 있다. 다만 쉽게 약속하거나 위로하지 않을 뿐이다. 후안이 샤이론에게 말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문라이트〉는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지나온 인물의 인생을 승리와 극복의 역사로 미화하거나 성장의 신화로 포장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인상적인 영화로 나아간다.

〈문라이트〉의 결말은 지나간 고통을 추억으로 포장할 필요는 없지만 그 시절의 고통이 현재의 삶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그 고통조차도 자아에 빛을 보태는 여정이 됐다는 위안쯤은 소유해도 된다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건 증오와 경멸보다도 사랑과 우정일 것이라는 희망을 남긴다.

나를 아끼던 너의 마음과 너를 아끼던 나의 마음이 나를 해치던 너의 마음과 너를 해치던 나의 마음을 이겨내고 인생에 숨을 불어넣는 힘이 된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담담하고, 묵묵한 인상으로.

결국 달빛 아래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샤이론의 얼굴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 시절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지금, 그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있는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분하고 은은한 위안을 남긴 채, 영화는 눈을 감듯 끝난다. 이미 샤이론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객석을 나선 우리 또한 그럴 것이라는 위안을 얻었으므로. 달빛처럼 오랫동안 올려다 보고 싶은 여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듯이.

(〈에스콰이어 코리아〉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글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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