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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문예지

인터넷과 SNS가 정보와 지식의 매체로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조건이자 인간관계의 양식(樣式)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문예지가 그에 걸맞은 소통의 형식과 언어를 개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겠다. 이제 성정치를 누락하거나 외면하고 한국문학의 인간탐구를 이어나갈 수도 없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작가, 시인들이 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문예지의 출현이나 문예지의 혁신은 그런 면에서 불가피하다.

  • 정홍수
  • 입력 2017.02.23 08:42
  • 수정 2018.02.24 14:12
ⓒAlexander Spatari via Getty Images

고등학교 때 독어 선생님은 수업 종료 5분 전쯤이면 교과서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치 치하의 독일 이야기가 많았다. 그 방식이 독특했다. 홀로코스트나 전체주의 같은 심각한 단어를 직접 언급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고, 그저 그때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가벼운 역사 소개였다. 그러긴 해도 그 이야기들이 어떤 비판적 시선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당시 유신 말기 겨울공화국의 정치 상황을 우회적으로 일깨우고 있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압적이고 획일화된 입시교육, 유신정권의 반공독재 이데올로기의 주입장으로 기능하던 당시의 교실에서 '참교육'을 선취한 지혜롭고 훌륭한 예가 아니었나 싶다.

문예지와의 첫 만남

문학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는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이나 「객지」 같은 한국소설에 대해 듣고, 『현대문학』이라는 문학지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그 수업 시간이었다. 『현대문학』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2년 남짓 매달 사보았다. 그게 문예지와의 첫 만남이었다. 잘 모르는 채로 비평 형식의 글을 읽기도 했지만 주로 소설 작품을 챙겨 읽었던 같다. 정소성의 연재 장편 『천년을 내리는 눈』, 조정래의 중편 「유형의 땅」, 이문열의 중편 「금시조」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나의 이런 개인적 독서이력과 무관하게 70년대 문예지의 중심은 그 인문적 지성과 사회적 실천의 몫까지 포함해서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었을 테다.

80년대 초반 내 대학 시절은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의 강제폐간 뒤에 열린 이른바 '무크지(magazine+book의 합성어)의 시대'였다. 황톳빛 표지로 나온 『실천문학』 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단행본처럼 권마다 제목을 달고 1년에 한권씩 나왔는데, 김지하 특집을 숨죽여 보고 송기원의 단편 「다시 월문리에서」를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변혁운동으로서의 문학이 큰 흐름이던 시절이었고 노동문학에 대한 논의들은 공부하듯 읽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돈이 조금 생기면 서점에서 『문예중앙』을 사서 보며 날선 의식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문학적 허기 같은 것을 달랬지 싶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창작과비평』이 복간되고, 『문학과지성』은 2세대 편집동인 중심의 『문학과사회』로 속간되면서 다시 문학 계간지 시대가 열렸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른 이념지형의 변화와 함께 매체환경의 급변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때까지는 문학창작의 기지, 문학담론을 중심에 둔 인문적 지성의 창구로서 문학 계간지의 자리는 나름 공고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계간 『문학동네』의 창간과 합류는 문학출판 시장의 성장과 확대를 반영하면서 새로운 문예지 시대의 도래를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사회 전반에서 문화의 산업적 성장이 이루어지던 때이기도 했다. 문예지를 기반으로 하는 문학출판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고 출판사 간 경쟁도 치열해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세대의 문예지, 보이지 않는 문학의 대체물

대학 졸업학기에 우연찮게 들어온 내 문학출판계 이력도 30년이 되어간다. 문예지 편집일도 해보았고 어느 때부터인가는 어쭙잖게 문학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문예지에 글을 쓰게도 되었다. 그간 늘 내 책상 한쪽에는 문예지가 놓여 있었고, 그건 지금도 크게 변함이 없다. 어쩌면 지금 눈앞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저 3,4백쪽 분량의 표지날개 없는 신국판 크기의 문예지들이 내겐 오랫동안 문학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세계의 대체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예지가 오면 부러 한쪽으로 밀쳐두었다가 뒤에서부터 후루룩 넘겨보기도 했다. 문예지의 특집글들을 읽고는 한국문학의 흐름, 행방을 손에 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좋은 작품이나 비평을 읽고 나면 오히려 머리가 멍해지며 안절부절 못했던 것은 왜였을까. 서평이나 좋은 비평의 각주는 내겐 문학과 인문학의 교사였다. 불성실한 학생이긴 했어도 말이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는 문예지에 대한 충성도가 옅어지면서 책장을 넘기지도 못하고 계절을 지나는 계간지도 늘어났다. 계간지 한호 안 읽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러긴 해도 곧 돌아올 일이 생기고 계절을 넘긴 잡지를 허겁지겁 뒤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아직까지 문예지, 문학 계간지는 내게 고만고만한 형태와 형식의 자명한 그 무엇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변화하는 문예지

문예지 출판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2015년 7월 창간된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AXT)』(은행나무)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민음사는 40년 전통의 계간지 『세계의문학』을 종간하고 2016년 8월 역시 격월간 문예지 『릿터(Littor)』를 창간했다. 창비에서는 기존 계간지 『창작과비평』과는 별도로 '젊은 문예지'의 기치를 걸고 2017년 1월 연 3회 발간하는 『문학3』을 세상에 내보였다. 『문학과사회』는 편집동인의 교체 이후 제호는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잡지의 창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혁신호를 내놓았다. 『문학동네』도 편집위원진의 대폭적인 교체와 출판사로부터의 상대적 독립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소설가와 시인들이 작품 발표와 발언 공간을 직접 마련하려는 독립출판 형태의 소규모 문예지도 여럿 나오고 있는 추세다. 일련의 변화는 최근 한국문학계 내에서 일어난 일들과 무관하지는 않되, 각 문학출판사 나름의 오랜 모색과 준비의 산물이기도 한 것 같다. 세상과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문예지의 모색은 늘 있어왔던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 보인다.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개별 문예지의 기치나 편집이 다 다른 만큼 뭉뚱그려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으나 변화를 관통하는 흐름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기존 비평에 대한 탄핵의 분위기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의 '위기' 심화에 비평가 중심의 문예지 편집 시스템, 작가와 독자 모두를 억압하는 폐쇄적인 비평적 글쓰기가 한몫했다는 진단이 일차적으로 놓여 있는 듯하다. 이해할 만하고, 한국문학 비평의 자기쇄신을 여러모로 궁리해볼 일이겠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도 있는 듯하다. 일각에서는 한국문학 비평이 그 담론과 제도의 영역에서 형성하고 조성해온 '문학' 개념의 해체 혹은 폐기를 요구한다. '여성혐오'를 내면화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남성적 교양주의 문학의 파산선고 같은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한국문학 내부의 부정적 행태들과 맞물리면서 이런 요구의 전압은 과도하게 상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과격한 파산선고가 아니라 한국문학 비평의 역사에 대한 온당한 이해와 비평적 대화일 것이다.

문학의 질문과 실험

인터넷과 SNS가 정보와 지식의 매체로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조건이자 인간관계의 양식(樣式)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문예지가 그에 걸맞은 소통의 형식과 언어를 개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겠다. 이제 성정치를 누락하거나 외면하고 한국문학의 인간탐구를 이어나갈 수도 없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작가, 시인들이 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문예지의 출현이나 문예지의 혁신은 그런 면에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내가 알고 이해해온 '문학'의 개념은 그 자신의 규격화된 답안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 우리는 끝내 개별 작품의 언어와 형식, 질문을 통해서만 문학을 만날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이상화된 모습을 그린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문학은 모순과 괴리 안에서 인간을 보여주고, 그것도 늘 그 시대의 공기와 현실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렇게 해왔다. 문학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반드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 간극 안에서 삶은, 그리고 문학은 다시 성찰된다. 보이는 것은 지금-이곳 문학제도의 산물인 책상 위의 문예지뿐이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고 규정되지 않는 것과의 긴장이 존재한다. 혹은 그 긴장을 통해 문학이라는 질문을 만들어간다. 새로운 문예지들은 공히 원고지 40매 안팎의 단편 형식을 선보이고 있다. 솔직히 무언가 덜 읽은 느낌도 들고 어색하다. 그러나 곧 작가들은 그에 걸맞은 서사의 리듬을 찾아내리라. 문학의 언어는 형식의 제약 안에서 스스로를 쇄신한다. 문예지들이 기획하고 있는 여러 문학적 실험은 기실 문예지의 형식, 그 존재 방식에 대한 도전이자 실험이기도 할 것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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