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환관들은 늘 나라를 말아먹었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온다. 특히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들은 나랏일로 골치 아픈 황제에게 달콤함을 선물한다. 황제는 이들이 좋다. 골치 아픈 나랏일도 항상 달달하게 이야기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달콤함에 휩싸인 황제는 나라를 급속도로 기울게 만든다. 중국 역사 속 환관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 중 세 가지가 여기 있다.

1. 후한 말에는 2천 여명의 환관이 죽었다.

“황건(황건적)이 평정되어 한숨 골린 후한 왕조에서 영제가 치세 22년의 막을 내리자 이를 계기로 환관과 관료 간에 대충돌이 일어났다. 영제 뒤로 14세의 황자 변이 즉위하고 하태후와 그 오빠 하진이 후견자로서 정무를 보게 되었다. 수도의 지사에 해당되는 사예교위 원소는 하진에게 권유해서 궁중의 환관을 주륙해 화근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하진은 우유부단한 탓으로 도리어 환관의 계략으로 궁중에서 암살되었다. 원소는 사태가 급함을 보고 군을 인솔해 궁중에 들어가 환관을 보면 나이를 가리지 않고 2천여 명을 전부 몰살해버렸다(189년). 이것은 몹시 난폭한 방법이었지만 전제군주가 무능력자인 경우 환관이 대신 전제를 행하므로 그 폐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책 ‘중국통사’,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 익히 잘 아는 사건이다. 당시 후한 말기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황제의 정치력은 땅에 떨어졌고, 환관들이 대신 그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환관 세력을 십상시(十常侍)라 부른다. 이들은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또한 매관매직에 앞장 섰다. 뜻이 곧은 관료들은 모두 낙향을 했고, 직언을 했던 몇몇 지사들은 처형 당했던 시절이다. 그것을 보다 못한 원소가 무려 2천여 명의 환관을 닥치는 대로 몰살시킨 이유다.

2. 당나라 말기 황제들은 환관의 문하생으로 불렸다.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해 연회 향락으로 세월을 지새우자 이에 따라 궁중 사무를 관장하는 환관이 자연히 세력을 얻었으며, 조정 관료가 장상(將相)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환관 고력사에게 알선을 의뢰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일컬어졌다. 희한한 것은 고력사는 미인을 아내로 맞아 영화에 탐닉하고 금전, 재화를 쌓아 불사(佛寺), 도관(道觀)을 건축해 국가의 힘으로도 미치지 못할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했다. 그 후 명군으로 칭송받는 헌종은 환관의 세력을 억압하려다가 도리어 환관에게 시해당했다. 다음의 목종은 재위 4년으로 끝나고 아들 경종은 재위 2년 때 환관에게 시해되어 아우 문종이 환관의 힘으로 옹립되었다. …. 문종은 환관의 전횡에 이를 갈면서도 결국 대항 조치를 찾아내지 못한 채 재위 14년을 마쳤다. 문종이 죽자 그의 뜻에 반해 아우 무종이 환관에게 옹립되어 즉위했다. …. 다음의 선종 또한 환관에 의해 제위에 올랐다. …. 그의 아들 의종, 그 아들 희종, 그의 아우 소종이 모두 환관에게 옹립된 천자여서….”(책 ‘중국통사’,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당나라는 대단한 나라였다. 세계 각국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상인들이 활발히 교류를 했던 곳이다. 그러던 당나라도 결국 환관 때문에 기울게 된다. 성군이었던 현종을 삼류 황제로 내려 앉힌 환관 고력사의 위세가 대단했다. 황제 이상의 힘을 휘둘렀다. 그 뒤의 황제들은 숫제 환관들이 앉힌 허수아비들이었다. 가끔 똑똑한 황제가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고 애썼지만 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당나라는 깊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3. 환관이 권세를 얻었을 때 그 탐욕은 상상 이상이었다.

“환관은 거의 전부가 하층 사회 출신인 만큼 세상물정에 밝았으니, 독서인 계급 가정에서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 입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단지 앞만 보며 과거 시험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무익한 학문 경쟁에서 이겼을 뿐인 고급 관료에 비해 실무 재능에서 탁월함은 비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과거 관료를 전폐하고 환관 정부에 만사를 맡긴다면 좋은가 하면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은 말하자면 염치와는 동떨어진 이익 추구자의 집단으로 모든 지혜를 짜내 그 지위를 이용해 뇌물을 탐하는 데만 유념하는 것이다. …. 환관이 권세를 얻었을 때는 그 규모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났다. 토목보 사변 직후 북경 정부가 왕진의 죄상을 엄히 물어 그 족당을 모조리 주살하고 그 가산을 몰수했더니 집 안에 금, 은의 창고가 60동이 있고, 산호수가 높이 6,7척 되는 것만도 20여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책 ‘중국통사’,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저자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관료와 애초 환관은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거의 하층 출신인 환관은 눈치도 빨랐고 세상 이치에도 능했다.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과거 시험에만 매진한 관료와 애초 경쟁이 될 수 없다. 능력이 뛰어난 환관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너무나 탐욕스럽다는 점이다. 명나라 환관 왕진의 경우 영종을 부추겨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몽골족 오이라트를 소탕하자고 권했다가 황제가 이들의 포로가 되게 만든다. 그 죄를 물어 왕진 일당을 모두 죽이고 가산을 몰수했는데, 왕진 집에서만 무려 금, 은을 쌓아둔 창고가 60동이나 있었다고 한다. 환관의 권세와 그에 비례한 부패 정도를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허프북스 #환관 #중국 역사 #후한 말기 #당 말기 #명 영종 #탐욕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