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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통일되면서 돈을 제일 많이 번 사람이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 중 독일은 꽤 늦은 19세기에 통일을 하였다.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덕분이다. 말 그대로 철과 피로 승부를 본 인물이다. 피야 사람으로부터 나왔다 하더라도, 철은 누구의 도움을 받은 것일까? 바로 ‘대포의 왕’이라고 불리는 알프레트 크루프(1812~1887) 덕분이었다.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국력을 키워나갈 때 함께 기업을 성장시킨 크루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크루프는 금속 사업, 특히 대포 제작을 했다.

“독일의 여러 주는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더 긴밀하게 뭉쳤고 1834년에 관세동맹(Zollverein)이 체결되자 각 주 사이에 왕래와 사업이 훨씬 더 쉬워졌다. 크루프는 이 변화된 상황을 이용하여 독일의 주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동전 염료에서 가정용 철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금속제품의 주문을 받았다. …. “대체로 1848년에서 1871년 사이에 프로이센이 독일을 장악한 과정은 알프레트 크루프가 독일 산업을 지배하게 된 과정과 같다.” 이 회사는 1843년에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군수산업에도 손을 뻗쳤다. 동생 헤르만이 크루프에게 19세기의 주력 무기인 강철 대포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설득하자 그는 ‘최초의 연강(軟鋼) 대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책 ‘저먼 지니어스’, 피터 왓슨 저)

어느 사업가든 때를 잘 만나야 한다. 그래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리는 법이다. 크루프는 시대를 잘 만났고, 그 흐름을 잘 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특히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이끄는 과정에서 군수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포로 자신의 기업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실패한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꾸려가던 회사는 파산 위기였고 경제적 이유로 아들은 학업을 포기했지만, 크루프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업으로 큰 성공을 일구었다.

2. 크루프와 비스마르크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1862년 이후 프로이센의 재상을 맡아 1890년까지 독일 총리를 지낸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는 크루프보다 3년 연하였는데 이 ‘강철 총리’와 ‘대포의 왕’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다 폭군형이었고 사람을 싫어해 친화력이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개와 나무를 좋아했고 크루프는 말과 대포를 좋아해 두 사람 모두 사람보다는 사물과 동식물에서 위안을 얻었다.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는 언젠가 “나는 오락을 그렇게 모르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크루프에 대해서도 “적어도 앵글로색슨의 관점에서 볼 때 그토록 공격적이고 호전적이며 파괴적인 이미지에 책임을 져야 할 프로이센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책 ‘저먼 지니어스’, 피터 왓슨 저)

같은 시기에, 정치와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비스마르크와 크루프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한번 만난 이후로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심지어 비스마르크는 크루프에게 자신을 계획 일부를 털어놓을 정도였다.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계획에서 대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고, 크루프는 해군력을 증강하려는 비스마르크의 계획으로 자신의 사업에 큰 이득이 될 것을 깨닫고 있었다.

3. 크루프 대포는 프로이센에게 잇단 승리를 안겼다.

“크루프의 대포가 위력을 발휘한 최초의 주요 전투는 (교전 양측의 주장) 1866년 7월 3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었던 쾨니히그레츠 전투였다. 성능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4개월 만에 추가로 700문의 크루프 대포를 주문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1866년에 벌어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은 비록 역사상 매우 짧은 전쟁에 속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는 엄청 났다. …. 1870년 비스마르트는 4년 전에 오스트리아로 유인한 것과 똑 같은 작전을 프랑스에도 사용했다. …. 구식 청동 전장포(前裝砲)로 무장한 나폴레옹 3세의 군대는 어느 모로 보나 프로이센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크루프의 신형 강철 후장포와 신형중(重) 박격포는 순식간에 메스와 스당의 요새를 초토화시켰으며 파리 외곽은 구멍이 뚫렸다.” …. 그 의미야 어떻든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거둔 승리는 크루프가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무기 주문이 봇물 터지듯 밀려든 것은 물론이었다.” (책 ‘저먼 지니어스’, 피터 왓슨 저)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자로 떠오른 것이 1866년 오스트리아, 1870-1871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다. 둘 다 크루프 대포의 활약이 대단했다. 엄청난 위력을 과시한 크루프의 대포 주문량이 폭주했다. 크루프는 천상 사업가였다. 기사 작위 수여를 국가로부터 제안 받았지만, 말단 기사 작위보다는 기업가의 선두에 서는 게 좋다며 거절했다. 이 당시에 활약했던 대형 제철소 기업가들 중 아우구스트 티센(1842~1926)이 있다. 1999년에 티센 사와 크루프 사는 합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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